올 해 초 어느 날, 남편은 11월 추수감사절 여행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부지런히 휴가를 계획했다 여행날짜가 가까워질 때쯤 예상치못한 이유로 방해받아 취소한 여행이 세 번이나 된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달로 여행을 떠나자고 했어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남편이 복권을 사듯이 희망에 부풀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가 취소하곤 한다는 걸.
딸아이는 우리가 스페인에 가면 유치원에 못가고, 태권도 승급심사를 받지 못한다고 짜증을 부렸다. 아이는 우리와 달리 일상에서 미래를 모은다. 우리의 일상은 오늘보다 우리가 젊은 미래가 오지 않는 이상 한 번씩 뒤집어주어야 할 두꺼운 고기 같은데.
꼭 가야 돼, 스페이인?
어, 이제는 취소할 수 없대.
11월이 되자마자 나는 남편에게 스페인 여행을 취소하라고 했다. 막상 여행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나는 만사가 귀찮았고, 눈가에 피멍이 들도록 부주의하게 돌아다니는 둘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고집스럽게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남편이 밉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커다란 캐리어 하나에 온 가족의 여행 짐을 꾸리고 남편과 내가 각자의 배낭을 하나씩 메고 집을 떠났다. 이번에도 나는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던 캐리어에 옷이랑 기저귀를 넉넉히 담았는데 공항으로 떠나기 직전 남편이 이번에는 작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가자고 했다. 나는 남편이 작은 가방이 여러 개 있는 건 불편하다고해서 큰 캐리어를 쓰기 시작한 거였는데 남편은 큰 캐리어는 내가 좋아해서 갖고 다닌 게 아니냐고 되묻는다. 나에게는 캐리어도 가방인데 남편에게는 배낭이나 핸드백만 가방이었던 것이다. 결혼한 지 8년만에 깨달은 우리 사이에 사랑보다 사전이 필요하다는 사실. 공항 가는 길에 나는 남편에게 너한테 캐리어는 가방이 아니었구나, 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집에서 서둘러 나왔지만 고속도로에서 다른 차량들끼리 난 사고 때문에 우리는 공항에 일찍 도착할 수 없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서 딸아이는 남편이 차에서 짐을 내리는 동안 주차장에서 볼 일을 봐야했다. 캐리어 두 개, 배낭 두 개, 딸아이 가방 하나, 카시트 두 개, 유모차 하나를 트렁크에서 다 꺼내고 남편이 오늘은 큰 캐리어를 갖고 오는 게 나을 뻔 했다고 얘기한다. 캐리어가 하나여야 하는 이유가 카시트와 유모차였다는 걸 우리 둘 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 당장 케이크를 먹어야겠다는 딸아이의 말보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딸아이의 맨 손이 더 크게 거슬려 나는 딸아이를 뒤로하고 걸었다.
비행기에 타기 전까지 왜 내 말대로 이 여행을 취소하지 않은 거냐고 남편에게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내 목소리를 빌려주지 않은 건 이 고비를 넘어가면 우리를 반겨줄 낯선 세상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언어, 낯선 풍경 속에서만 보이는 서로의 서툰 모습이 우리의 맨 처음을 닮아서 그런 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너를 세워두고 오래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