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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Oct 10. 2020

나 이뻐?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 5

누구보다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 마음에 가깝다. 잊고 지내다 잠깐 다시 떠올려도, 오랜 시간 오해하고 있었어도 결국에는 좋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잃어버린 책은 책장 한 구석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지갑을 열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읽혀서 그 마음속을 헤매다 서서히 잊히는 책도 있으니까. 한 때는 내 두 손에 붙들려 나에게 그 속을 모조리 털어놓고 나를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책을 다시 찾아본다. 그동안 잊고 지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떠오를지 모를 기억을 이야기하고 싶어, 숨은 그림을 찾는 심정으로 나의 책장을 살펴본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 시절에 어울리는 제목의 책 “백 년 동안의 고독” 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책장 앞을 차지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목만 열심히 읽어온 이 두 권의 세계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알았던 적이 없으므로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마르케스의 책 반대편에는 볼 때마다 그래, 이뻐, 하고 대답하게 만드는 도리스 되리의 단편 소설집 “나 이뻐?”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잃어버렸다 되찾은 책은 바로 이 책, “나 이뻐?” 다.

   

제목만 읽어도 좋은 책과 그래, 너 이뻐 대답하게 만드는 책



   코로나의 영향으로 집 안에 몸이 묶이고 나서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듯해도 알고 보면 제 자리에서만 날뛰는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초능력이라는 걸.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했지만 우리의 하루가 이렇게 무기력한 적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밤늦도록 잠 못 들고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대학 시절 그 새벽. 내가 지금 그 새벽 속에 갇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지나간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나의 일상에서 마주할 사소한 모든 것은 스물몇 살 시절의 나를 되살릴 수 있다. 지난여름 거실 소파에 앉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알게 된 도리스 되리의 소설집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와 이 소설 속 인물 파니 핑크가 영화 파니 핑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나 이뻐?” 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처럼 그리워졌다.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잊어버렸다. 다만 분명히 기억나는 건 책이 자리하고 있던 도서관과 어두운 내 방 그리고 트리니다드.


책, 대여에서 소유로

   

   읽고 싶은 책 제목을 검색하고 책 등록번호를 작은 종이에 옮겨 적은 뒤 책을 찾아 도서관 책장 사이를 오가는 산책을 한다. 그러다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면 원래 찾아보려던 책을 가지러 가는 길이 점점 길어진다. 빌리려던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이미 내 두 손에 다른 책이 여러 권 들려있는 상태. 그 어느 곳보다 조용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측 불가능한 세계로 가득한, 도서관을 좋아한다. “나 이뻐?” 역시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찾아다니던 길에 제목만 보고 충동적으로 집어 들어 빌려 읽은 책이었다. 아마 그때도 마음속으로 그래, 이뻐를 말하고 혼자 웃었던 것 같다. 이제는 대학 도서관이 아니라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나 이뻐?”를 검색한다. 절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중고책 검색을 시작한다.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카드 결제를 한다. 책을 받아볼 때까지 편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예전처럼 도서관 책장 사이를 헤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래, 이뻐. 나 이뻐? 소설집 중에서 트리니다드를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이 소설집 제목이 트리니다드였으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책의 정가는 9.800원, 중고 판매가는 4,700원, 미국에 살고 있는 내가 지불한 가격은 26달러. 읽어보고 싶은 책을 사서 읽는 사치를 부릴 수 없던 시절을 지나 절판된 중고책을 비싼 값에 구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지금,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라도 마음을 되살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펼치고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그동안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간직하고 있던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책,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내 마음대로

   

   “나 이뻐?” 에는 17개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작가 도리스 되리가 태어난 나라, 독일을 배경으로 쓰였다. 작가는 부부, 부모, 자식, 연인, 친구, 이웃 등 사람들이 서로 맺을 수 있는 관계와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 속에는 서로 사랑하면서 불화하고 서로를 향한 사랑의 끝을 보았으나 그 끝을 외면한 채 살아온 습관대로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내고 스스로의 삶까지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와 지위에 우월감을 느끼며 베푸는 친절과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빚어내는 세상을 향한 오해가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전혀 새롭지 않다. 소설 속에서도 용서와 화해는 어렵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건 긍정을 과장하는 말, 부정을 축소시키는 말, 차라리 거짓이면 좋을 진심의 말뿐. 그러니까 이 단편소설집을 지배하는 정서는 적어도 나에게는 지금, 여기, 우리의 허무와 공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택배가 도착한 날, 상자를 뜯어 책을 꺼내 내가 기억하고 있는 “트리니다드” 가 진짜 있는지 책을 급히 뒤적였다. 이십 대의 내가 감명받았던 문장이 그때처럼 그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단지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는 더 인간적이고 더 개방적으로, 더 즉흥적으로 살 수 있다는 거야…… 이곳에 사는 우리는 모두 행동 장애자들 같아. 그저 증오하고 시기할 줄만 알고, 이것저것 정해놓은 규칙은 수천 개도 넘지…… (나 이뻐? 중 트리니다드,  62쪽)

   

   이 문장만 놓고 보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모험을 꿈꾸는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을 가로막는 여러 장애물을 뛰어넘고 끝내 자신이 바라던 이상향을 찾아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전보다 더 큰 좌절을 겪게 될 이야기 일 것만 같다.

   

   “트리니다드”의 진짜 이야기는 이렇다. 어렸을 때 독일에서 뉴욕으로 엄마와 둘이 이민을 간 백인과 흑인 사이의 젊은 혼혈 여성, 지니가 어느 한 가정의 베이비시터로 고용되어 독일로 돌아온다. 지니의 백인 엄마는 죽었고, 지니의 흑인 아빠는 지니 엄마와의 신혼여행 직후 사라져 지니의 인생에 존재한 적이 없다. 지니가 베이비시터로 일할 집에는 샤를로테와 로베르트 부부 그리고 그들의 딸 레나 이렇게 세 식구가 살고 있다. 이야기는 지니가 독일에서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샤를로테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지니와 함께하는 일상생활이 번갈아 놓인 구조로, 우리는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와 서로를 향한 속마음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이야기의 주된 사건은 샤를로테 가족이 휴가로 떠난 샤를로테 소유의 농장에서 일어난다. 트리니다드 출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로베르트가 딸 레나를 훈육하는 상황이 부부싸움으로 변질되고 샤를로테의 애원에도 화가 난 로베르트가 가족을 벗어나 다시 혼자되는 시간을 찾아 떠나버린다. 이 모든 상황 속에 혼자만 가족으로 묶여있지 않은 지니가 샤를로테와 레나를 특별히 애쓰지 않고 위로한다.


책,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스물몇 살의 내가 이 이야기를 다 읽어보기는 한 건 지 모르겠다. 로베르트가 묘사하는 트리니다드 만 읽고 책을 덮어버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트리니다드에 가보고 싶던 마음만 기억나는 걸 보면 말이다.

 

고향이 트리니다드라던 그 여자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하더군 [...] 어쨌든 그 여자가 나더러 택시를 함께 타지 않겠느냐고 했어 [...] 나는 동의했고, 그때부터 놀랄 만한 여자의 변신을 목격하게 되었어. 고향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여자는 달라졌어. 완벽하게 차려입은 뻣뻣한 바비 인형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여자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어. 살아난 바비 인형은 킥킥거리며 웃어대고, 택시기사와 외설적인 농담을 나누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어. 그리고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게 했지. 그러자 갑자기 택시기사가 의자 밑에서 럼주병을 꺼내서는 우리에게 돌리는 거야. (나 이뻐? 중 트리니다드, 61쪽)   

   

   트리니다드가 고향인 여자가 그곳에 도착해 삶의 긴장을 풀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여자의 본래 모습으로 변해가는 걸 읽으며 한국을 떠나고 싶어 했던 나는, 외국에서 십몇 년을 보낸 뒤에야 나의 트리니다드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로 돌아가 말해주고 싶다. 지금, 여기, 우리가 도망치고 싶어 하는 바로 지금, 여기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우리를 자유롭게, 꾸밈없이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고. 그래도 트리니다드의 택시기사처럼 음주운전은 안된다고.

 

   오해 속에 기억하고 있던 이 이야기는 내가 꿈꿔본 적 없는 지금을 나보다 먼저 향해 있었다. 뉴욕에서 독일로 도착한 지니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독일어에 죽은 엄마가 살아나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을 때,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와 영어가 모국어나 다름없는 아이들 사이를, 그 거리를 가늠해봤다. 샤를로테와 로베르트가 싸우는 장면에서는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어른들의 다툼 가운데 무시당한 존재로 상처 받는 아이가 아니라, 그 고통을 세상에 남기는 부모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남편을 어깨 위에, 딸은 손바닥 위에, 베이비시터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무대 위를 빙글빙글 도는 서커스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샤를로테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잦은 출장으로 자신 하나만 돌보면 되는 생활에 익숙해진 남편과 나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두 아이가 바로 나의 지금, 여기, 우리니까.


   트리니다드, 이 이야기는 지니와 샤를로테, 레나 셋이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증오를 반대하는 궐기대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지니와 샤를로테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지금껏 읽어왔는데 두 사람이 이런 모임에 같이 있다는 건 아주 짓궂은 농담이거나 관계의 전환이다.   


지니: 나를 고용하기 전에 샤를로테는 편지로 시시콜콜 나에 관한 것들을 물었어. 하지만 내 피부 색깔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지. 공항에서 ‘지니 바울즈’라는 팻말을 들고 서 있는 그녀에게 내가 다가갔을 때의 그 표정이라니…… (38쪽)
내 몸이 그녀의 몸과 같지 않다는 게 정말 기뻤어.(67쪽)
그런 피부로는 삶을 이겨낼 수가 없어. (69쪽)

샤를로테: 그녀의 독일어에는 약간 이상한 악센트가 섞여 있어 늘 신경에 거슬린다.(43쪽)  
그런 부츠는 스킨 헤드나 네오 나치 들이나 신는 거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렸지만 지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니는 그 신발을 나치 부츠라 부르며, 저 혼자 낄낄대며 매일같이 열심히 닦는다. (68쪽)
모두들 신기한 동물이라도 쳐다보듯 지니를 바라보고 있다. (68쪽)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아볼 시간도 없이 베이비시터와 아이 엄마라는 관계를 맺고 서로의 사적인 일상을 공유한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지냈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하는 건 상대방이 자신의 일상에 없는 듯이 존재해주는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서로 다른 피부색과 몸집을 매일 마주 보고, 같은 언어지만 다르게 말하는 소리를 매일 들으며 그러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와 무엇이 다른가를 순식간에 알아채는 일은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영원히 불화하기도 힘든 존재라는 것. 사람들과 손을 잡고 커다란 원을 만들어 ‘우리는 증오에 반대합니다’를 외치고 킥킥거리는 지니는 그 모임 가운데 유일한 흑인이었다. 그걸 보고 어색해하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지니를 따라 웃는다. 증오를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보다 증오에 반대하는 웃음이다. 좋다.


좋아해, 책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게 좋다. 자꾸 잊어버려서 그렇다. 책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책을 읽을 때, 책을 읽고 나서 기분이 어땠는지가 흐릿하게나마 기억나서도 그렇다. 좋아했던 책은 여전히 좋고 싫어했던 책이 좋아지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이 나이 들어 그 깊이를 알 수 없게 되더라도 나는 나란히 똑바로 놓여있는 책 속의 문장을 바라보며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을 배운다. 맥락과는 무관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을 발견한다. “나 이뻐?” 그래, 너 이뻐.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역자 후기에는 트리니다드에 관한 언급이 없다.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는 계속됩니다. 다른 작가분과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매일 각기 다른 작가의 1~2편 글이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함께 써 내려갈 것이고, 함께 책으로 묶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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