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류연재

만세

by 준혜이

이 세계 속 나의 합법적인 존재를 증명하는 서류를 들고 운전면허증 재발급을 받으러 DMV에 (Departments of Motor Vehicles) 다녀왔다. 더 이상 유효기간을 넘겨버린 뉴저지 운전면허증을 외면하고 유효기간이 남아있는 캐나다 운전면허증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데 하루, 면허증 재발급 신청 서류를 모으는 데 또 하루가 걸렸다. 쉬운 일도 어렵게 만드는 마음이 문제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불친절한 직원들과 시간 낭비로 악명 높은 DMV에 가는 일이라면 내 마음이 아니라 이 사회가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새벽 5시, DMV 건물 한쪽 끝에서부터 시작된 줄의 가운데 지점, 이것이 나의 성취였다. 내 뒤로도 사람들이 하나 둘 줄을 서기 시작해 건물 다른 쪽 끝까지 줄이 길어지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간이 의자를 줄 세워 놓고 차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사람, 담요를 뒤집어쓰고 간이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 아침부터 줄담배를 피우며 걸어 다니는 사람, 나처럼 같은 자리를 서성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침 8시까지 사무실 문이 열리기를, 번호표를 받아 따뜻한 사무실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사무실 문 여는 시간이 다가오자 간이 의자를 치우는 사람, 자기 볼 일은 없으면서 같이 기다려준 사람도 있었던 건지 차를 타고 떠나는 사람이 있었고, 차를 몰고 와 가족인지 친구인지에게 커피를 건네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담배 연기, 커피의 온도, 자동차 배기가스가 분명한 겨울 아침이었다.

19번. DMV 직원이 나에게 무슨 용무를 보러 왔냐면서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번호표를 내밀었다. 이게 식권이었으면. 내 뒤에 서 있던 아저씨는 자기 뒤에 서 있던 여자가 깜깜할 때 자리 좀 봐달라고 하고 차에 들어가 번호표를 받기 직전까지 앉아 있다 나온 걸 봐준 사람이었다. 아저씨가 운전 면허증에 있는 주소를 바꾸러 왔다고 직원에게 말하자 직원은 아저씨에게 번호표를 주지 않고 그건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걸어가며 말했다, 아저씨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눠 주면서 아저씨에게 온라인으로 주소를 바꾸라고 했다. 그때 나와 아저씨의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나이 많은 남자가 속상해서 흐익하는 소리와 함께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말았다. 이 아저씨 새벽 5시부터 기다렸어요, 그냥 번호표 주세요, 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DMV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아저씨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고 아저씨는 뒤늦게 번호표를 받았다.

건물 밖에서는 자발적이었지만 건물 안에서는 허리에 권총, 탄창, 수갑을 찬 경비의 지시에 따라 줄을 서 있어야 했다. 껌을 씹고 있는 경비의 턱이 마스크 밑으로 보였다 안보였다 했다. 사무실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던 마음은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가 한 사람씩 오라는 직원의 말에 얘는 내 아내야! 소리치며 가는 할아버지, 그 뒤를 머뭇거리지 않고 따르는 할머니에게 빼앗긴 마음이 되었다. 그 둘은 증명서류가 부족했는지 볼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 자릿수 번호표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운전면허 재발급을 받기까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DMV에 8시가 지나 도착해 건물 밖에 줄을 선 사람들도 아마 세, 네 시간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 하나, 하나가 시간을 얼마나 오래 끌 지 그 불확실함까지 세고 있어야 했으므로 불 꺼진 사무실 건물 앞에 추위와 함께 서 있던 사람들보다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요즘처럼 외출이 제한된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의 불친절과 친절은 예전보다 마음에 오래 남는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DMV와 이 세계의 멸망을 곱씹을 게 뻔하니까 나는 Trader Joe’s 에 간다.

Trader Joe’s 입구에서부터 직원이 반갑게 인사한다. 벌써 기분이 좋아져 집에 가도 될 정도가 되었지만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식료품을 쇼핑 카트에 담았다. 매일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이 가져온 여러 가지 서류를 보면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사람에게 좋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잘 아는 걸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해지고 불친절해지고 사람들을 다 하나같이 지겨운 서류로만 보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만료되지 않을 친절한 기억으로 사람이 사는데. 계산대에 서 있다 친히 나를 에스코트하러 성큼성큼 다가오는 저 청년은 나중에 얘는 내 아내야! 소리치는 할아버지가 될 것 같다. 누군가를 돕는 말을 주저하지 않을 사람 같다. DMV가 없는 세상을 만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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