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은 하루가 빨리 지나간다. 발코니 문 앞에 서서 빈틈없이 내리는 눈을 보고 서 있는 시간이 하루를 보내는 틈틈이 끼어들어 그렇고 눈이 잦아드는 때를 제 때 알아채 삽을 들고 밖으로 나가 드라이브 웨이를 치워야 해서도 그렇다. 마스크 속에 머물다 안경에 김을 서리게 하는 체온과 따뜻하게 가려진 시야 속에 들이치는 눈바람으로 시린 눈의 감각에 살아있다는 걸 실감한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라면서 눈이 온다. 공중에서 후추 갈리는 소리가 난다. 해가 뜨지 않은 것처럼 사방이 뿌옇고 깨진 유리 조각이 깔린 듯 쌓인 눈이 빛난다. 보기보다 살아있는 계절을 삽으로 뜬다.
아이들이 눈 위로 눕는다. 나도 아이들을 따라 누워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눈과 눈 사이 빈 공간을 채운 회색을 찾아보았다. 안경알 위로 떨어진 눈이 녹아 물방울이 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누워있다 일어난 우리는 소리 내어 웃으며 장갑 낀 손으로 서로의 등을 털어주었다. 아이들은 나처럼 눈에 젖지 않았는데 안경을 쓰지 않아서 그런가, 나보다 몸집이 작아서 그런가 하다 내 앞을 걸어가는 아이들에게서 나는 스키복 쓸리는 소리를 들었다. 딸아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슬퍼 보인다고 말해서 춥고, 축축하고, 무거운 슬픔을 느꼈다.
동네 아이들이 쌓인 눈 속에 발을 푹푹 꽂으며 뛰어다녔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스쿨버스를 타고 내리는 아이들 무리를 매일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날씨가 유난히 좋은 날 아니면 눈이 쏟아지는 날에만 우리가, 동네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온다. 두꺼운 외투와 모자, 장갑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모두 예전보다 키가 크고 몸집이 커졌다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들의 발이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그 자리에서 눈이 모래처럼, 폭죽처럼 튀었다. 우리는 그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서로 얼마간의 거리로 가까울 수 있는지를 알고 지킨다, 피한다, 멀어진다, 모른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리는 날 하늘에서는 이름 모를 색으로 해가 지고 밤이 내린다. 혼자 조용히 썰매를 타는 딸아이가 별로 신나 보이지 않길래 내가 나서서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며 썰매를 탔다. 둘째는 썰매가 멈추는 자리에 눈으로 벽을 세우고 그 옆에 서서 우리를 기다렸다 활짝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아이들이 나를 아이처럼 사랑해서 나를 아이처럼 사랑해줘, 바라면서 누구와도 말 못 하고 싸울 수도 없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준혜이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