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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Jul 06. 2022

특기는 존재

   나의 몸은, 요즘 달리기에 푹 빠진 남편에게, 눈으로 보기에만 마라톤 여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래전 어느 날, 스마트폰으로 핫도그 먹기 대회 뉴스를 읽고 있던 남편이 소파에 쿠션같이 놓여있는 내 앞에 우뚝 서서 지긋이 날 바라보다, 세계 최고의 푸드 파이터 같다고 감탄한 적도 있네. 이런 찬사는 이제 너무 지겨워. 나의 몸이 나의 특기. 아니, 사실 자세히 알고 보면 나의 특기는 존재. 다만 존재에게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다, 존재는 그 어떤 말과 생각도 세상에 실천하지 않는다, 라는 차원에서.  


   사람들이 여럿 모인 어떤 자리에서 반얀 나무와 바나나 나무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동안 들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얀나무는 그 주변에 다른 생명이 자랄 수 없도록 땅 속 영양을 다 차지해 자신의 몸집을 불리고, 바나나 나무는 한 번 열매를 맺고 쓰러져 죽어 후손의 번영에 기초가 된다는 말이었다. 내 귀에 들리자마자 마음속 깊숙이, 순식간에 뿌리내린 이 이야기는, 그 후로 오랫동안 나에게, 혼자만 살기 위해 누구를 죽이고 있나, 모두를 살리기 위해 홀로 죽어가는 누가 있는가,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디에서 언제 죽었나, 아직 살았나, 하는 잡념으로 들끓는 하루하루를 선사했다.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잖아, 나는. 그리하여 남편의 환상은 현실이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로, 남편은 회사로. 에어컨과 제습기가 여름의 온도와 습기에 저항하며 나지막한 기계음을 연주하는 평화로운 평일 오전, 소파에서 분연히 몸을 일으킨 나는 현관문 앞에서 운동화를 근엄하게 꿰어 신고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 집 앞 소나무 주변을 뱅뱅 돌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느리게 달리는 내 몸이 무거워, 역시 나의 주특기는 존재였는가. 하지만 몸속 어딘가를 꺼뜨릴 듯이, 끊어버릴 것처럼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던 지독한 문장들이 달리는 동안 서서히 알 수 없는 곳으로 흩어져갔다. 달리기에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나와의 결코 영원하지 않은 단절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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