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눈으로도 다채로운 눈 결정을 하나하나 구별할 수 있을 것만 같이 천천히 줄지어 내리는 눈. 그 무수한 빛 조각 아래 낯익은 차 한 대가 동네 고등학교 주차장에 멈추어 서 있다. 곧 주위를 둘러싼 새하얀 정적을 차 문 열고 닫는 소리로 둔탁하게 가르며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선다. 우릴 향한 이 모든 눈동자에도 불구하고 홀로 피치 못할 고독 속을 달릴 준비는, 아, 장갑 또 안 꼈네, 되어 있다.
동네 아저씨와 남편과 셋이 달리는 길에 나이 드신 분 여럿이 함께 모여 우리 반대편으로부터 마주 걸어오신다. 서로서로에게 굿모닝을 구호처럼 외쳐 주면서 제 갈 길을 가는 이 순간이야말로 고스란히 위 아 더 월드, 힐 더 월드. 우리보다 오랜 세월을 이 동네에서 살아온 아저씨가 내리는 눈송이를 입김으로 모조리 다 녹일 듯이 목소리를 낸다. 저분들 예전에는 우리처럼 같이 달리다가 이젠 같이 걷는 거래. 그 말에 우린 언제까지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게 될까,를 이야기해 본다.
적어도 애들이 대학 가기 전까지는 여기 머무는 편이 좋겠지만, 또 모르지. 나중에 애들이 정착할 곳으로 따라 이사 가는 건 애들이 너무 싫어할 거고. 그래도 여기가 의료 체계가 그나마 나으니까 매사추세츠에는 있는 게 낫지 않나, 그럴지도. 우리 모두에겐 여전히 무슨 일이든 가능해 보여, 섣불리 지금 여기 이게 전부라 여기면서, 아무리 두 눈앞이 뿌옇고 숨이 차더라도 오래도록 꿈꿔온 세상을, 영영 다 털어내 버릴 순 없겠네,라고도 말해볼 걸.
준혜이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