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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인류연재

잼과 꽃다발

by 준혜이

어제는 얼마 전 엄마 장례를 치른 란지네서 독서모임을 했다. 우리가 각자의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안부를 물을 때, 작년부터 란지는 종종 엄마가 죽어가고 있어,라고 인사해왔다. 그러면 우린 란지에게 하나마나한 위로의 말을 진심으로 건네거나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어떤 날엔 두 눈을 질끈 감고 물기 어린 숨소리만을 침묵 대신 건네기도 했다. 집 근처 농장에 들러 라즈베리잼 한 병과 꽃다발을 샀다.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 위에 누워 온 생애 마지막을 무방비하게 전시하는 나이 든 엄마 곁에서 책상 의자에 앉아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 소설을 소리 내어 읽는 중국 이민자 중년 여성. 누가 이미 소설로 써 출간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슬몃 드는 란지의 세월을 혼자 상상해 보며 차를 몬다.

Sorry for your loss는 분명히 내게 한국말로 어떡해, 가 될 것이다. 현관문 앞에 나와 우릴 맞이하는 란지를 가볍게 끌어안는다.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 우리에게 그는 신발을 벗지 말고 그냥 들어오라고 말했다. 란지네 거실은 곧 이사 나갈 집처럼 여러 개의 상자들이 한쪽 벽을 차곡차곡 채우고 있었다. 엄마 장례 치르고 정신이 나갔는지 우릴 집으로 초대해 놓고 식탁이며 소파 안락의자 등등 오래된 가구들을 모조리 다 버려버렸다는 란지. 나는 란지가 연락해 주었다면 장례식장에서도 그를 꼭 안아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란지가 우리에게 원하는 친밀함의 정도는 이만큼. 내가 아는 란지는 그가 내게 보여주는 모습까지만. 집안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이 불편함이야말로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가 서로에게 발휘하는 예의 바른 존재감의 실제.

란지 품에 안긴 꽃은 구겨진 담요를 닮았다. 꽃잎이 두툼하고 털도 나있어 바라보는 순간 금세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다. Celosia, 맨드라미, 닭 벼슬꽃. 화려한 빛으로 서서히 말라죽어갈 꽃다발보다 짙은 초록 잎사귀가 주렁주렁 매달린 식물 화분을 사다 안겼어야 했나. 란지는 지금 그 어느 것에도 깊이 마음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 잃은 딸에게, 스스로를 위해, 최선의 도리를 다하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한다. 인류애의 기초는 나를 잊은 채, 나를 제외한 모든 걸로 다져져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나는 너를 결코 위로할 수가 없어.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꿰어 신을 필요도 없이 그대로 삭막한 거실에서 밖으로 나와 우리가 다시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어떻게 흐를지 몰라 아,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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