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화면 속 한껏 멋을 부린 여성과 그에 못지않게 꾸민 남성이 각자 빨대 꽂힌 아이스커피 한잔씩을 앞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긴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여자가 입을 연다. 혹시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니, 안된다고 그러면 대답 안 들을 거야? 거실 바닥에 앉아 밥을 먹던 내가 옆에 있는 남편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자주 한국 연애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저녁을 먹는다. 이건 결혼한 지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우리의 정서적 욕구불만을 해소해 줄 청춘의 식사랄까. 그럴 리가. 한숨과 함께 숟가락을 밥그릇에 내리꽂으며 나는 말했다. 나한테는 낯선 사람이랑 단 둘이 있을 일이, 그게 여자건 남자건 이제 없을 거야? 단 둘의 세계를 내가 너로 마무리했다는 게 좀 아쉽다? 남편은 뭐 저런 게 다 있어하는 표정으로 내가 남긴 밥까지 몽땅 먹어 치울 뿐이다.
오늘,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를 정비소로 모셔가는 견인 트럭 안에서 기사와 단 둘이 약 20분간 함께 있게 되었다. 조수석에 올라앉은 내 발아래로 너저분한 던킨 도너츠 봉투가 눈에 거슬린다. 트럭이 출발하기 전 도저히 참지 못하고 허리 숙여 쓰레기를 한데 모아두었다. 몸을 일으키자 이번엔 기사와 나 사이에 놓인 말보로 한 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담배 몇 개비가 사라져 공허한 담뱃갑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가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의 문화적 배경을 (Ethnicity)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사람입니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차창을 내리고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탓에 그가 내게 건네는 모든 말은 길 건너편 사람을 향한 외침이었다. 나한테 무슨 냄새 나나. 혼자 오는 동안 차 안에서 담배를 피웠나. 속으로 궁금해하면서 그의 질문에 목소리 높여 성의껏 대꾸했다. 나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연해 한낱 시간 때우기에 불과한 이야깃거리조차 될 수 없는 그런 얘기가 이어졌다. 이윽고 정비소에 도착하기 3분 전. 서서히 성글어지던 대화는 끝내 침묵이 되었다. 그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말로 내 마음은 소란하게 들끓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첫사랑에 실패만 하지 않았어도 너만 한 아들이 있었을 텐데.
정비소 한편에 홀로 서서 지난 세월을 가만히 되돌아본다. 오랫동안 나와 남편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어느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한 채 연인이자 친구, 배우자, 부모, 형제, 자매, 동료, 전우 등등 사람 사이에 붙일 수 있는 모든 이름의 관계를 서로 무모하게 기대해 왔지. 이젠 서로에게 그런 전부를 바랄 수도,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되어주기 어렵다는 것 또한 잘 안다. 그런데 지금 남편이 매일 오늘 처음 만난 사람 같기까지 바라는 건가 깨달을 무렵, 정비소 주인이 내게 불쑥 다가와 스타터를 교체해야 한다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렇게 남편 아닌 다른 누군가와 단 둘이 있고 싶다는 바람은 우리 일상에 심각한 불편을 끼치고 예상치 못한 비용을 청구하며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입방정 좀 그만 떨어야겠다는 결심은 하지 않아. 다만 입방정에도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걸 자각했으므로 앞으로는 더욱 정확하고 집요한 언어생활로 분발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