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펭이란 무엇인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봉제인형 놀이의 추억은 초등학교 때였다.
털이 고르지는 않지만 동글동글 귀여운 베이지색 코알라 엄마 인형과 아기 코알라 인형이 세트였다.
그 인형을 많이 아껴서 오랫동안 내 보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친구들에게 관심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인형놀이는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로 내 인생에 인형은 끝일줄 알았다.
그런데...
내 삶에 인형놀이가 다시 등장할 줄이야.
이준호에게 입덕하고 덕메님들을 만나면서 새로 접한 재미있는 문화가 '예절샷'이었다.
예절샷은 좋은 장소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아하는 연예인의 포카 또는 인형을 꺼내어 가지런히 나열하고 사진을 찍는 것을 뜻한다.
처음에는 귀엽고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풍파를 겪을 만큼 겪은 다 큰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나란히 인형을 놓고 사진을 찍는 뒷모습을 상상하니 귀엽고 웃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인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준호의 굿즈인 '펭펭이'는 이준호를 닮은 펭귄 캐릭터이다.
이준호가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이준호의 별명인 '황제'에 착안한 황제펭귄으로 팬아트를 그린 팬이 있었고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공식캐릭터로 황제펭펭이가 탄생했다고 한다.(출처 : 디씨인사이드)
이준호팬이라면 마땅히 하나쯤은 소지하여 예절샷을 찍어줘야 하는데!
나는 너무나 늦덕이라서 펭펭이 굿즈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딱 하나만, 사진용으로 펭펭이 인형이 딱 한 개만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굿즈계에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한번 지나간 굿즈는 돌아오지 않는다.
는 것이다.
콘서트도 이미 몇 개월이 지났고 다음 콘서트는 기약이 없는 애매한 비활동기에 굿즈를 구입하기는 쉽지 않다.
지나간 굿즈는 품절이 되면 재입고가 되지 않으며, 중고시장에서 프리미엄을 붙인 매물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고시장에서 가장 최근 펭펭이 인형은 원래 가격의 3배 정도에 올라와 있다.)
당시에는 중고시장에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펭펭이를 구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 JYP 재팬 온라인 샵에서 펭펭이 인형을 판매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국 사이트가 아니라니, 일본 사이트라니!
지금까지 그 어떤 진귀한 물건도 나를 직구의 세계로 인도하지 못했다.
좀 비싸도 물건은 한국에도 있고, 한국에 없으면 비슷한 다른 물건 쓰면 되고, 없으면 안 쓰면 되고, 정 대체가 안되면 나중에 현지 여행을 가서 직접 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펭펭이는 그럴 수 없었다.
비슷한 다른 펭귄인형은 펭펭이가 아니다.
더 비싸게 주고 살래도 판매자가 없을 수도 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덕질하며 일본 사이트에서 뭘 더 사고 싶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정말 너무 하기 싫었던, 평생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직구!
이준호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배대지 어플 다운받기, 배대지 회원가입하기, 해외주소를 일본으로 선택하기, JYP재팬 회원가입하기, 주소에 배대지 주소 적기, 장바구니에 굿즈 담기, 결제하기, 물품 발송이 되고 나서 배송대행 정보 적기, 배송대행료 결제하기
(배대지 = 배송대행지의 준말. 해외사이트에서 물품 구매 시 국내까지 배송 안 되는 물품을 배송대행지를 이용해서 국내로 보낼 수 있다.)
머리가 하얘지는 이 복잡한 과정을 다정한 덕메님이 도와주셨다.
난생처음으로 직구에 성공하고 어찌나 감사하고 뿌듯했는지 모른다.
3개월이 지나 첫 펭펭이가 내게 도착했다.
드디어 나도 펭펭이가 있다!
기쁨도 잠시.
펭펭이에 대한 소장욕이 스멀스멀 커져갔다.
2025년 미드나잇썬 콘서트 버전 펭펭이를 구매했음에도 또 지나간 펭펭이가 눈에 밟혔다.
그렇게 하나 둘 모은 펭펭이 인형이 지금은 10개가 되었다.
펭펭이 수건, 펭펭이 귀걸이, 펭펭이 도장, 펭펭이 스티커, 펭펭이 아크릴 키링, 펭펭이 클립 등은 별개로 하고도 말이다.
그냥 펭펭이 인형을 소지하는 것을 넘어 펭펭이에게 목걸이를 만들어 주고 펭펭이 집을 마련해 준다.
어느 날 주렁주렁 늘어난 펭펭이 가족을 돌보며 1시간 넘게 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또 한 번 놀랐다.
(이 정도는 애교 수준임을 밝힌다. 펭펭이 인형에게 갖가지 옷을 입히고 가방 등의 액세서리를 달아주는 고차원 덕후들이 많다.)
이 나이에 이토록 열정적으로 인형놀이를 하게 될 줄이야!
나는 왜 펭펭이 덕질을 시작했을까?
일단 펭펭이는 귀엽다.
이준호라는 상징성을 모조리 빼고 인형 자체만 봐도 매력적인 펭귄이다.
동그란 큰 얼굴, 조금 내려간 팔자 눈썹에, 좌우대칭이 안 맞는 삐죽거리는 부리, 핑크핑크 볼터치, 배에 있는 노랑 하트, 봉긋 솟은 엉덩이, 앙증맞은 팔과 다리.
펭펭이들만 모아놓아도 정말 귀엽고 깜찍하다.
물론 다이소에서 파는 펭귄 인형도 귀엽다.
다이소 펭귄인형의 크기가 더 커서 솜값도 더 들었을 것 같지만 인형의 가격은 훨씬 저렴하다.
그러나 다른 펭귄 인형은 이준호라는 상징성이 없다.
펭펭이는 이준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고 이준호가 귀여워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준호가 콘서트에서 쓰담쓰담해주고 뽀뽀해 주고 이리저리 흔들며 날렸던 그 펭펭이,
딱 그 펭펭이는 아니지만 내 펭펭이도 그만큼 이준호가 귀여워하고 사랑스러워 해준 펭펭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티셔츠 한가득 이준호 얼굴을 새겨 넣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준호 얼굴이 뚜렷하게 박힌 아크릴 키링이나 포토카드를 가방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기엔 나는 너무 어른이다.
그러나 펭펭이 인형은 다르다.
숱한 인형 키링 중에서 귀엽고 독특한 펭귄인형을 선택해 달고 다니는 직장인으로 일코가 가능하다.
(일코 = 일반인 코스프레, 덕후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덕후가 아닌 일반인처럼 다니는 것을 뜻함)
그저 펭귄 인형을 좋아하는 어른 여자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사회적 체면을 챙기면서도 이준호를 사랑하는 잊프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마치 종교 활동을 할 때 몸에 지니는 성물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릴 때 묵주반지와 스카풀라를 몸에 지니고 다닌 적이 있다.
(묵주반지, 묵주팔찌 = 가톨릭 신자들이 기도를 할 때 사용하는 묵주를 반지나 팔찌 형태로 만든 것)
(스카풀라 = 가톨릭에서 신앙과 헌신을 상징하는 작은 천 목걸이)
몸에 지니는 성물은 신앙의 표지이자 기도 생활을 실천하는 도구이면서 내 곁에 항상 내가 믿는 신이 함께 하신다는 마음의 안식이기도 했다.
기적의 메달이나 묵주팔찌를 몸에 지니면 언제나 나와 함께 그분이 계셔주실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펭펭이를 지니고 다니며 펭펭이와 예절샷을 찍으면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준호는 이 세상에 단 한 명이지만 이준호의 정신은 전 세계의 수백만 팬들과 함께 하여,
특히 펭펭이를 비롯한 그의 굿즈와 함께 할 때 나는 혼자인 것이 아니라 이준호의 정신과 함께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읽으며 필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신다면, 그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 것은 지난 2025년 6월 13일, 이준호의 더샘 글로벌 팬사인회 때였다.
이맘때 나의 이준호 굿즈 집착은 날로 커져서 이미 지나간 시즌의 펭펭이를 모으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몇 년 지난 이준호 시즌그리팅, 포토북, 티셔츠까지 욕심을 내며 모든 아이템을 이준호 굿즈로 채우고 싶어질 무렵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준호와 직접 일대일로 만나는 80명의 행운의 주인공들은 이준호 굿즈를 입고 있지 않았다!
펭펭이 머리끈을 매고 있지 않았다.
펭펭이 목걸이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들의 사랑과 정성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라서 분명 나보다 이준호 굿즈가 적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팬사인회에 당첨되었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 및 자금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들은 그저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메이크업에 가장 아름다운 옷을 골라 입었을 뿐이었다.
진짜 이준호를 만나는 날에는 펭펭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펭펭이는 내가 이준호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상징물이고 이준호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물 이준호와 일대일로 만날 때는 상징물 따위는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진짜 살아 움직이는 내 앞의 이준호에게 나의 가장 빛나는 모습만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 이준호 과거 굿즈에 대한 나의 욕심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언젠가 내가 일대 다수가 아닌 일대일로 이준호를 만날 날이 온다면 그때 나는 이준호의 지나간 굿즈 티셔츠를 입거나 펭펭이 인형으로 꾸민 가방에 펭펭이 귀걸이를 하고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메이크업에 가장 공들인 헤어를 하고 나를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옷과 액세서리를 골라 몸치장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내 평생 수백만 잊프들의 경쟁을 뚫고 이준호를 만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오늘도 실물 이준호를 볼 일이 없는 나는 귀여운 펭펭이들을 하나씩 꺼내어 쓰담쓰담해 준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늘 함께 있어.
오늘도 나는 이준호와 함께 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