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 있다.
그것은 바로 탈덕과 휴덕의 흔적이다.
탈덕은 입덕과 반대되는 단어로써 덕질을 그만둔다는 뜻이며 휴덕은 덕질을 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준호 굿즈를 하나 둘 모으며 온라인 중고 시장을 돌아다니는 취미가 생겼다.
내가 몰랐던 이준호의 시절에 판매했던 다양한 굿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지나간 굿즈를 판매하는 판매자들 중에는 탈덕하거나 휴덕하는 분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덕질 대상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애정이 식어 라이트팬으로 남기도 한다.
(라이트팬 = 덕질 대상에게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가볍게 즐기는 팬)
하루는 이사 가며 물건을 정리하는 잊프님께 이준호의 앨범을 드림받게 되었다.
(잊프 = 이준호 팬, 이준호 프렌드)
그녀도 여전히 이준호 팬인 것 같았다.
미친 듯 불타오르는 시절은 지나고 잔잔한 애정으로 바라보는 팬.
쇼핑백 가득 이준호의 앨범과 캘린더, 비공식 포토카드 등을 끌어 안고 황송한 마음으로 올라탄 버스에서 문득 마음이 시큰해졌다.
언젠간 나도 그런 날이 오겠지?
절절 끓는 지금이 지나면 뜨거운 열정이 가라앉는 날이 오겠지?
지금은 사실 이준호 하는 삶이 주된 삶이고 나머지는 내가 해내야 하는 업무로 느껴지는데...
사랑호르몬이 보통 30개월 정도 지속된다고 하던데, 내 사랑도 30개월이 지나면 잔잔한 응원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지금 모은 이준호 굿즈들을 보며 처치 곤란이라 느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했다.
굿즈를 들이면서 먼 훗날을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휑하게 마음에 바람이 부는 일이다.
이 비슷한 감정을 블로그나 트위터, 유튜브를 보면서도 느낀다.
촘촘하고 열정적으로 이준호의 삶과 덕질의 기록을 남겼던 선배님들이 더 이상 새로운 게시물을 올리지 않는 장면을 마주할 때.
2~3년 전부터 어느 순간 포스팅이 끊긴 블로그, 업데이트가 안 되는 트윗과 유튜브를 보면 오겡끼데스까! 외치고 싶어진다.
현생으로 바쁘신 건가요. 탈덕을 하신 건가요. 혹시 새로운 사람이 생겼나요.
어깨를 두드리고 싶어진다.
그럴 때면 마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를 듣고 돌아와.
이 노래를 듣고 돌아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선배님들 돌아오세요.
처음 덕메님의 인사를 접했을 때는 눈물이 찔끔 났다.
한동안 쓸쓸하고 마음이 아팠다.
성인이 되어 덕질을 해보는 것이 처음이라 덕메님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상상해보지 않은 처음이라 너무 크게 다가왔다.
이렇게 감정이 요동치는 내가 더욱 당황스러웠다.
사랑이라는 게 호르몬 영향이 있어서 사이버 남자친구든 실제 남자 친구이든 1년~2년이면 두근두근하는 시간은 끝이 나기 마련이다.
실제로 매일같이 만날 수 있는 애인과의 만남도 2년을 넘기기 힘든데 연예인을 사랑했다가 마음을 접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 또한 2년 넘게 연애를 지속하는 게 어려웠던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한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큰 열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은
그래요. 안녕. 잘 가요. 언젠가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나요.
웃으며 쿨하게 보내기가 어렵다.
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이 노래를 듣고 돌아와'를 부르고 싶어진다.
혹여나 열정 넘치던 내 브런치의 [아무튼, 이준호] 발행이 어느 순간 끊기는 장면을 목도하고
'이 노래를 듣고 돌아와'를 부르고 싶어질 누군가가 계신다면
걱정 마세요.
저는 여전히 네이버 블로그에서 이준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다만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이 심리적 허들이 높을 뿐입니다.
닉네임 잊드라로 [있는 힘껏 행복하기] 블로그를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이준호에 대한 포스팅을 작성한 것은 작년 5월이 처음이었지만 블로그를 새로 파서 첫 글을 올린 것은 2024년 7월 17일이었다.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는 '아까워서'였다.
이준호 덕질을 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낯선 감정을 느끼면서 정말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고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을 비공개로 남기는 게 아까웠다.
그리고 재밌었다.
내 일상을 남기는 것보다 이준호에 대해 기록하는 게 더 재밌었다.
물론 내 일상이 이준호이기도 했다.
블로그를 하다 처음 브런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브런치를 시작했다.
덕질이 재미있는 만큼 블로그 글쓰기도 브런치 글쓰기도 재밌었다.
1년이 지났다.
이준호에 대한 나의 사랑호르몬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까지 블로그에 덕질 기록을 남기는 걸 한 번도 미뤄본 적이 없다.
1년 전에는 '내가 이런 걸 하다니! 내가 이런 걸 사다니!' 매 순간순간 스스로에게 놀랐고 그래서 새롭고 그래서 더욱 기록할 게 많았다.
지금은 '당연히 해야지. 이걸 왜 안 해? 왜 안 사?' 자연스레 생각하는 덕후가 되었다.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 장담하지 않는다.
덕질을 기록하는 데 시큰둥해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언젠가 지나간 지금의 기록을 바라보며
맞아. 이때의 나는 정말 열정적이었지. 진심이었지. 재미있었지. 즐거웠지. 많이 아끼고 사랑했지.
추억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 노래를 듣고 돌아와' 노래를 들어도 마음이 꿈쩍도 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괜찮다.
지금 나는 즐겁고 재밌고 진심이고 많이 아끼고 사랑하니까.
순간순간을 담는 시간이 소중하니까.
곱게 담아서 예쁘게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지금 이 순간, 있는 힘껏 행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