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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ho Sep 05. 2020

말더듬이지만 괜찮아

홍콩 진출기 9탄

- 1991년의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난 말레이시아에서 2년반 가량을 보내고, 아버지가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 기억에 그 당시 난 말을 조금 더듬었지만 심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부산에서 1년 정도 지나니 나의 말더듬이 굉장히 심해졌다. 하루는 아이들 앞에서 책을 읽을 때 너무 심하게 더듬어서 그날 집에 와서 생각을 할수록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아이들의 비웃는 소리가 계속 내 귀에서 들렸다. 난 그 후로 초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자살을 생각했다. 선명한 기억이다.

- 1993년 초등학교 6학년

6학년이 되자 내 말 더듬은 최고조로 향했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아이들 앞에서 돌아가며 책을 읽는데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제발 종아 울려라.. 하지만 종은 울리지 않았고 내 차례가 됐다. 첫마디를 뗄 수가 없었다. 정말 한마디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조용히 일어났고, 선생님 앞에 쪼르륵 힘없이 걸어 나가.. 선생님에게 저 책을 못 읽겠어요.라고 말해버렸다. 그게 내 은인이자 내 최초의 스승이라 말할 수 있는 이기자 선생님과의 첫 대화였다.

수학여행 때 선생님 얼굴을 가렸던 나 / 이기자 선생님과 졸업식 사진

이기자 선생님은 내게 학교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지만 또 우리 집에 수시로 우유를 사들시고 방문을 해주셨다. 아직까지 왜 내게 우유를 사다주셨는진 모르겠지만(못살지 않았는데 ㅎ). 부모님에게도 이대로 두지 말고 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아보라고 권유하셨던 것 같다. 가족이 아닌 남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많이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학년마다 선생님이 달랐는데 누구 하나 내게 이런 관심을 보인적은 없었고, 오히려 내 말 더듬을 놀리는 선생님도 있었다. 당한 사람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기자 선생님 밑에서, 난 점점 자신감을 되찾았고 말 더듬은 학년말이 되자 많이 좋아졌다. 이기자 선생님은 내게 스승 그 이상 어떻게 표현이 안된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은 정말 달라졌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절대 반장 부반장 선거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나가질 않았다. 뭐 공부도 썩 그리 잘하진 않았지만, 나갈 조건이 돼도 안 나갔던 이유는 아이들 앞에서 "차렷." 이란 말이 안 나왔다. "차"라는 단어가 내게는 굉장히 힘들었다. 말 더듬는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이 든다. 사실 중고등 대학생을 거쳐서 지금까지 나는 꾸준히 말을 조금씩 더듬는다 ㅎ. 초등학교 때처럼은 당연히 아니지만, 약간 성격이 급한 사람처럼 보일만한 정도로 더듬는다. 아내는 요즘 "싸이코지만 괜찮아" 드라마를 본 뒤 오정태와 내가 자꾸 오버랩 된다면서 놀린다. -_-;

삼촌 아니고 형이야.. 뭐 이런 대사들을 내가 따라 해 준다. (아내가 즐거워하니 -_-;;)

그랬던 내가 지난 십여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하는 게 가장 재밌어졌다. 그리고 가장 잘하는 분야 중에 하나가 되었다. 분명 난 외향적인 아이였지만 동시에 말 더듬 때문에 내성적인 면이 굉장히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컴공과를 나온 내가 프로그래밍을 안 하고 국내외를 돌며 발표를 하고 미팅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 전 난 홍콩에서 홍콩과 싱가포르 정부가 스폰하고 노키아, 파나소닉이 투자자로 참여한 글로벌 컴페티션에서 내가 지원한 분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20 IPHatch  결선 피티 모습 (코로나로 마스크 착용하고 피티함)

파이널 피치 발표 뒤 한 달 후 어제 발표가 나왔다. 그리고 심사단과 미팅을 가졌는데 내 파트너 패트릭이 우리를 선정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묻자. First of all, your pitch was great. 그리고 둘째 셋째 불라불라 얘기했다. 둘째 셋째는 비즈니스 모델과 향후 발전 가능성 등을 얘기한 것 같은데, 이미 나는 첫째에서 자아도취에 빠져 다른 걸 자세히 못 들었다.

 오늘 갑자기 예전 어렸을 때의 내 모습이 떠오르며 심장이 쿵쾅거리며, 선생님한테 말을 못 하겠다고 반 아이들 앞에서 고개숙인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수능 재수도 하고... 군대에서 총도 잠깐 잃어버려 보고.. 학고도 맞아보고.. 취업재수도 해보고.. 스타트업 회사에 내 월급 석 달치를 못 받기도 해 봤고.. 나도 나름 내 딴에는 정말 힘든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국내외 스타트업 대회, 정부 주관 대회, 디자인 대회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한국과 싱가포르에 내가 하는 비즈니스도 시장점유율 선두업체로 만들어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BM(Business Model) 내에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홍콩에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BM의 scale up에 한계를 느껴 이렇게 다른 신사업 쪽을 많이 두드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분명 나는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엑싯을 한 것도 아니고 IPO를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그런 것들이 내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 더 느낀다.

 2달 전 새로운 신사업을 준비하며 새로운 회사의 BM을 완전히 뜯어고치면서 새롭게 만들어가고, 컴페티션까지 함께 준비하면서 내 파트너 Patrick에게 한말이 있다. "패트릭, 나는 정말 이런 스타트업에서 내가 하고 싶은 BM을 만들 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고 내 온몸의 감각들이 미쳐 날뛰는 것 같아. 그래서 너무 즐거워." 

 그리고 내가 만든걸 내 입으로 말하고 싶다. 혹여 다시 말을 더듬더라도 내 입으로 말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행복하고 그 과정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내 기준의 성공이다. 이번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내 나이 70세에도 새로운 스타트업을 만들어서 백발의 노인네로 스타트업 경진대회를 나가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사위원쪽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난 박진영 말마따나 언제까지나 딴따라이고 싶다.

 내 모든 것 되시는 우리 주님 그리고 내 곁에서 언제나 나의 뮤즈로 핵심적인 조언만 해주는 내 아내, 무조건적으로 날 믿고 사랑해주시는 부모님, 장인어른, 장모님, 신앙적으로 날 이끌어주신 목사님, 너무 감사할 사람들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어릴 적 말더듬이였던 나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나를 일으켜주신 우리 이기자 선생님께 내 온 마음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오늘도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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