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진출기 10탄
2018년의 어느 겨울 내 대학 후배가 홍콩에 출장차 왔다가 나를 찾아왔다. 완차이의 타파스 맛집에서 저녁과 가벼운 와인 한잔을 마시면서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거주하는 것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그러던 와중 후배가 내게 "형은 비즈니스 하면서 앞으로 뭘 가장 해보고 싶어요?" 조금 생각하다가 답을 해줬다. "내가 한국에 오기 전에 블록체인 포럼에 갔는데 거기서 전문가인척 하는 애들이 무대 위에서 수백 명 보는데서 다리 꼬고 앉아서 패널 토론을 약간 거만하게 하던데 나 그거 해보고 싶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패널로 나가 다리 꼬고 있어 보기." 말하고 서로 막 웃으며 또 한잔을 기울였었다. 그렇게 유명 포럼에 패널로 나가서 다리 꼬고 있어 보기는 그 날로 내 버킷리스트에 올라가게 됐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만인 올 2020년 12월 3일 그 버킷리스트 소원 하나를 지우게 됐다. Business of IP Asia Forum에 스타트업 우승자 자격으로 IP와 스타트업을 주제로 패널로 나서게 됐다. 작년 이 포럼의 패널들은 수백 명 앞에서 한 걸로 사이트에서 봤는데, 올해는 코로나 덕분에 홍콩 컨벤션 센터 스튜디오에서 원격 라이브로 하게 됐다. 그래도 그나마 스튜디오에서 해서 다행이지.. Zoom으로 했다면 정말 버킷리스트 안 지웠을 것 같다.
홍콩의 왕언니 캐리람 행정장관께서 친히 오프닝 스피치를 해주셨다. 내가 우승한 IPHatch 도 직접 언급해주기도 했다. 내 차례는 이날 오후 3시였는데, 1시 반부터 와서 리허설해야 한다고 해서 12시쯤 도착해서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솔직히 조금 떨릴 줄 알았는데, 살짝의 설렘과 버킷리스트를 한다는 살짝의 흥분 정도만 있었던 것 같다. 난 항상 이런 순간마다 예전 창이공항 CEO 앞에서 했던 피티를 떠올린다. 8년 연속 세계 공항 1등을 만든 그 CEO앞에서도 한 번 더 안 떨고 잘했는데 이쯤이야.. <- 난 중요한 피티 때마다 조금 떨릴라 치면 이 생각을 한다. 근데 이 날은 이 생각도 할 필요 없이 그냥 좀 많이 덤덤했던 것 같다. 1시 반이 되자 먹던 커피를 들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아직 전 타임 세션이 진행되고 있던 터라 조용히 들어갔더니, HKTDC의 담당자인 클라라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사회자와 같이 패널로 나갈 사람들이랑 가벼운 네트워킹을 하고 마이크를 채우고 둘러보니, 아 정말 제대로 하긴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살짝 즐겁기까지 했다. 뭔가 코로나 때문에 대충 하는 거였으면 김샐뻔했는데, 그래도 갖출 건 다 갖추고 해서 기뻤던 것 같다.
하루 전에 사회자랑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말을 좀 맞췄었다. 그래서 사회자가 나에 대해 많이 파악을 해 놓은 상태로 관련된 질문들을 한다고 해서 어느 정도 예상 질문은 뽑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3시가 됐다. 이제 우리 세션이 시작할 차례다. 우리 세션 중에서도 2 파트로 나뉘었다. 첫 파트는 노키아 파나소닉 등 글로벌 회사들이 IP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앞으로 시장이 어떤지에 대해서 먼저 30분 풀 원격으로 진행하고, 나머지 30분을 현장 스튜디오에서 하는 세션으로 나뉘었다. 클라라가 먼저 가서 스튜디오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난 앉자마자 아직 시작하려면 30분이나 남았는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오키! 드디어 해냈어!" 현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그리고 원격으로 보는 내 동료들 역시 내가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딱 한 사람 내 아내 빼고는. 아내는 재작년 완차이에서 후배랑 저녁을 먹을 때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내용들을 다 알고 있었고, 내 목적이 뭐였는지도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첫 번째 세션이 끝나고 우리 세션이 됐다. 막상 시작을 하니 어느 카메라를 봐야 하지, 사회자가 말하고 있는데 사회자를 바라봐줘야 하나. 코로나 때문에 칸막이가 다 있어서 불편한데, 마스크 이것도 불편한데 등등. 잡생각들이 들어왔다. 다행히 사회자가 나 말고 바로 옆에 있는 패널에게 먼저 물어봤다. 그분이 말하는 동안 조금 정리가 됐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나름 그래도 잘 선방한 것 같다. 아내도 라이브로 보다가 첫 질문 잘 답하는 거 보고 어. 잘하네. 다리도 잘 꼬고. 그리고 바로 끄고 본인 업무를 봤다고 한다. ㅎ. 잘하다가 실시간으로 관객이 채팅창에 왜 한국에서 홍콩까지 와서 비즈니스를 하냐고 물어본걸 사회자가 보고 내게 물었다. 사실 내 브런치 글 중에 내가 홍콩에 가는 이유에 대해서 이미 적어놓았는데, 차마 이 긴 스토리를 다하긴 그랬고 그냥 생각 없이 난 챌린지를 좋아해서 한국에서 싱가포르로 싱가포르에서 홍콩으로 이렇게 계속 도전 중이라고 답했다. 모범 답안은 아니었지만, 이것 밖에는 생각이 안 났다. 근데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모르겠다. 전에 적었던 데로 아내 덕분에 오기로 마음을 처음 먹었던 건 맞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냥 이끌리는 데로 왔고 어쩌다 보니 사람들을 만났고 어쩌다 보니 새로운 일도 시작을 했고, 어쩌다 보니 여기 패널로 나가게 됐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하면 너무 과대 포장이 되어있고, 생각보다 코로나 중이라 막 잘되진 않아도 굶어 죽지 않는 거보니 죽지 않을만큼은 그분이 항상 채워 주시는 것 같다.
어쨌든,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패널 토론은 잘 마무리됐다. 마치고 바로 집에 일찍 들어가려고 했는데 미디어에서 인터뷰 좀 하자고 해서 인터뷰 좀 하느라 평소 퇴근시간보다 늦게 집에 가게 됐다. 그리고 12월 9일에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IT 행사라 알고 있는 Switch (Singapore Week of Innovation and Technology) 행사 중에 하나인 Techinnovation에서 비슷한 성격의 패널로 초대받아, 이번에는 코로나 덕분에 싱가포르에는 못 가고 Zoom으로 참여하게 됐다. 뭐 다 괜찮았는데, 사회자가 사전에 배포한 질문이 아니라 완전히 전부 즉흥적으로 질문을 해대서 사실 조금 당황스럽고 언짢았지만 그래도 잘 대처한 것 같다. HKTDC의 클라라가 나중에 전화와서는 싱가포르 건도 잘 봤다고 하면서, 2021년도 홍콩 IT 컨벤션 행사 중에 패널로 또 참여를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감사하게도 제안을 해줘서 흔쾌히 해주겠다고 했다. 컴페티션 때부터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준 클라라에게 많이 고마웠다. 이렇게 홍콩 정부와 얼떨결에 좋은 네트워크를 만들게 됐다. 난 그냥 완차이에서 술 마시면서 우스개 소리로 패널로 나가 다리 꼬고 싶다고 했던 것이 2년 만에 할 수 있게 됐고, 더 좋은 기회와 네트워킹을 만들어가며 좋은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홍콩 정부도 사실 한국 사람이 홍콩까지 와서 그것도 IT를 가지고 사업을 기획하고 만들어내고 있는 것에 스토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버킷리스트는 그냥 허세 그 자체였지만, 그 결과가 꼭 허세만으로만 끝나진 않을 것 같다.
버킷리스트 뭐 거창할 필요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