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진출기 3탄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프레젠테이션은 2009년 MS, Yahoo, NHN, Daum 4개 사가 주최한 매쉬업 콘테스트 Final Stage였다. 가상세계와 그 당시 처음 나온 개념이었던 Facebook Connect와의 연결이 내가 만들었던 제품이었다. 난 너무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대본을 들고 올라가버렸다. 피티를 시작하다가 중간 정도에 사람들을 바라보다 그만 대본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못 찾았다. 난 한참을 헤맸고 결국 피티는 망쳐버렸다. 결국 2등으로 대회를 마감하게 됐다.
그 일이 있은 후 난 다짐을 한 게 있다. 다시는 책 읽듯 대본을 들고 피티를 하지 않으리.. 그렇게 시간이 지나 싱가포르 일을 시작했는데, 지난번 진출기 때 까지만 해도 피티라기보다는 그냥 비즈니스 회의만 했었다. 그러다가 L사에서 내게 창이 S/W 피티를 해야 하는데 담당 회사가 직접 하라고 하는 바람에 첫 기회가 왔다.
그 당시 난 제안서 만드는 것도 초짜라 많이 어설펐다. 창이에게 보여주기 전에 L사에게 보여줬더니, 이렇게 해서는 전부 빠꾸 당할 거야 라고 했다. 말인즉슨, 창이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겨우 이렇게 제안서를 만들어서 발표를 하려고 하느냐라는 핀잔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거기서 조금만 수정해서 난 피티를 하러 갔다. 발표장에는 창이 GM 및 담당자 4명이 참여했으며, 우리 쪽은 L사, 하드웨어 파트너, 소프트웨어 파트너(나), 이렇게 총 6명 총 10명이 피티 룸에서 피티를 진행했다. 우선 하드웨어 파트너 피티가 먼저였다. 발표자는 외국에서 10년간 산 거의 원어민 수준의 담당자였다. 제안서도 디자인 백그라운드 답게 정말 잘 만들었다. 하지만 발표 때 청중을 이끌지 못하고 계속해서 창이에게 끌려다녔다. 그렇게 피티 발표가 끝났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됐다. L사 및 우리 다른 한국팀들은 영어도 잘하고 제안서도 잘 만든 하드웨어팀도 박살 났는데 넌 말하나마나겠다 라는 표정이었다.
내 피티 자료는 총 21장이었다. 한 장 한 장 발표를 해 나갔다. 한 장이 끝날 때마다 "Is it clear for you?"라고 그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넘어갔다. 10p 정도에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피티.. 내가 이끌어가고 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나한테 집중되는 게 느껴졌고, 어설픈 제안서가 나의 말에 세련됨을 덧입혀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장을 마치고, Let me summarize today`s presentation 하면서 마지막 정리까지 깔끔하게 처리하고.. 감격스럽게도 창이 GM이 웃으면서 박수를 쳐줬다. 그날은 지금까지 내가 했던 어떤 프레젠테이션보다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그 GM은 소셜트리 프로젝트 이후 성과를 인정받아 VP로 승진하여 지금까지도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일을 주고 있다. :)
피티를 마치고 L사 직원들은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분은 내게 은밀한(?) 제안도 했었다. 심지어 피티를 마친 후 창이는 L사 담당자를 불러 L사는 하는 일이 뭐냐라고 몰아붙혔다고 한다. 내가 피티를 너무 잘해, 내 존재감이 커져, 메인 컨트랙터인 L사의 존재감이 없어진 것이다. 그 후 L사는 쟈기네들이 피티를 진행해보겠다고 했다가, 결국 우리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피티 진행의 임팩트가 약해 다시 내가 이끌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제안서도 형편없었는데 피티를 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두 가지다. 첫째는 매 페이지마다 디스크립션을 만들어 달달달 외웠다. 지난번 브런치 글에도 썼다시피 영어는 외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번 외워놓자 이제 내가 말을 가지고 놀 수 있게 됐다. 즉, 입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영어가 나가다 보니 상황에 따라 조금 바뀌는 것 정도는 레고 맞추듯이 맞출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두 번째는 쫄지 않았다. ㅎ '여기서 내가 영어 제일 잘하고 SW 제일 많이 알아.'라고 속으로 외쳤다. 외국인보다 영어를 잘할 순 없지만, 그렇게 마음가짐을 가지고 들어갔다. 사실 L사에 내가 멘토로 삼고 싶었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내게 외국인한테 피티 할 때는 그냥 "씨x, 내가 영어 제일 잘해"라는 마음가짐으로 들어가라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해본 것이었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프레젠테이션은 선물포장이다. 실제 선물이 별로더라도, 포장을 이쁘게 하면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 물론 선물 자체가 어느 정도는 퀄리티를 유지해줘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좋은 프리젠터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