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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d Enabler Apr 03. 2022

19. 함께 가는 길

나는 10년째 워킹맘이다. 

주말을 제외한 시간에 아이의 일에, 특히나 아이의 학습에 신경을 쓴다는 게 참 쉽지 않다. 주중에 챙겨야 할 것도 꽤 있다 보니, 학습을 위한 시간은 쭉 밀리게 된다. 그렇다고 주말에 공부를 하는 것은 내 학창 시절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 아이의 자기 주도는 '하면 좋은 것'이 아닌, 정말 절실한 필수요소였다.

우리 집의 자기 주도는 스스로 공부를 찾아서 하는 것은 아니다. 신이 해야 할 마땅한 일을 알아서 하는 것이다.


아이가 8살이던 어느 날, 아이의 외할머니, 즉 나의 엄마로부터 강력한 컴플레인을 받았다.

'아니! 대체 뭐 하는 거야? 엄마가 숙제를 챙겨야지, 정말 하루 종일 숙제하라고 하기 너무 힘들다!'


유치원 다니던 시절부터 간혹 나오는 숙제가 있거나, 없어도 스스로 아이는 신나서 풀고, 재미있다고 알아서 풀어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아싸!'를 외쳤었 것만, 오히려 초등생이 되고부터는 세상에 더 재미난 것이 많은 맛을 알았는지, 숙제를 뒷전으로 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권고를 받은 그날, 아이를 앉혀놓고

'이 문제집은 누구 것이냐? 숙제는 누구의 것이냐?'하고 질문을 던졌다.

'제 것입니다.'

'이 문제집을 만든 사람은 누구를 위해 만들었냐?'

'저요...'

'그런데 왜 할머니가 네 숙제를 하라고 챙겨야 하는 거니?, 정작 숙제를 해야 하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데, 할머니, 엄마, 문제집 출제자는 시간을 써야 하니?'


순간 질문을 받은 아이의 표정미묘히 달라졌다.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

'부끄럽고 좀 미안한 마음요...'

'그래? 그런 마음이 드는가 보구나. 앞으로 어떻게 해보고 싶어?'

'제가 열심히 챙겨서 할게요.'

'엄마가 네가 챙겨서 할 수 있게 시간표를 만드는 건 도와줄 수 있어. 도움받고 싶니?'

'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시간표를 만들었고, 나는 엑셀로 표를 그려 넣어줬고,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으로 표를 채워 넣었다.

그 이후로는 자기 주도 숙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뒤로 아이는 크게 깨닫고 숙제뿐만 아니라 학습과 생활까지 스스로 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쓰면 참 해피엔딩일 텐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오직 숙제 활동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것도 가끔 고비는 존재한다.


나의 바람은 아이가 숙제의 자기 주도를 넘어서 자신의 삶의 주체적인 존재로 좀 더 나아가는 것인데, 참 거창하기 짝이 없다.

그 거창한 바람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씨앗 심듯이 아이와 함께 한다. 어려운 것은 습관의 패턴을 끊는 일(가령 코로나 확진이 되어 일주일을 지도 아프고 나도 아팠던 일)이 생기면, 다시 습관을 만드는 데 이전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주 '엄마는 너에게 이제 책가방 미리 챙겼니?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구나. 그전에 네가 알아서 챙겨놓을 수 있지?' '네~'

그러더니 좀 있다 '다 챙겼어요!'란 말을 했다.

'그래, 미리 알아서 챙기니 잘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됐을 때, '엄마가 책가방 열어서 확인 안 해봐도 되지?'

'네~ 제가 잘 챙겼어요~, 엄마 책가방 오늘은 많이 가볍죠?' 라며 책 무게도 자랑하며 아이는 말했다.


아이가 가고, 오늘 무엇을 배우나 잠시 궁금해진 나는 시간표와 책꽂이를 보며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네 권! 아이가 챙기지 않은 교과서 개수였다.

세 과목의 책을 챙겨가지 않은 아이가 과연 수업시간에 어찌할지... 아니 이 모든 걸 그냥 한 번에 알아서 하는

아이는 지구 상에 없는 건지... 아님 있는데 우리 집만 이런 건지... 아이고야...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내 아이의 자기 주도는요, 내가 전생에 나라를 백번은 구해야 해요.'




'책가방 오늘 많이 가볍죠?' 했던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참 그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는 내지 않으리라. 먼저 알은 체도 안하리라.


수업시간에 책을 두고 다니면 무엇이 불편한지 본인이 겪어보고, 기억해내고, 수정해내야 반영이 될 수 있다. 언제까지 내가 다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을 참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불편해지겠지.


스스로 걷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의 품에서만 자란 아이는 뼈와 근육이 약해지고 감각이 무뎌져 스스로 걸어야 할 때가 왔을 때 걷지 못하게 된다.

- 핀란드 공부혁명, 박재원/임병희 지음


본래의 생각도 있었지만 아이가 초등생이 되면서,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의 소신을 세우는 과정에서,

자기 주도-메타인지 참 중요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근데 그것이 참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그 두 가지는 어른인 나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10년생 아이는 오죽할까...

아이가 이루려면 그전에 어른인 내가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10년의 길을 아이와 함께 빼툴삐툴 걸어왔다. 


그 길을 거치면서 들은 생각은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말들을 듣고 아이가 깨우쳐 자기 주도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 요행은 적어도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아이도 자신의 길 안에 스스로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를 찾아야 한다.

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관찰하고,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때로는 아주 색다른 방법도 찾아보며 함께하는 지금의 매일이 아닐까?


앞으로도 이렇게 순간, 한 순간 같이 성장하며 걸어가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가벼워지는 마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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