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길을 묻다ㅣ전북 부안 격포항, 궁항
바닷가 마을인 격포에는 채석강과 적벽강이란 두 곳의 강이 있습니다. 이 두 곳 모두 중국에 있는 채석강과 적벽강과 비슷하거나 그만큼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바닷가 지명에 강(江) 자를 붙여 쓰고 있다는 것이 어색하지만 이미 격포의 고유명사가 돼버린 지 오래입니다.
채석강과 적벽강은 가까이 있지만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채석강은 수만 권 책을 켜켜이 쌓놓은 것처럼 퇴적된 편모암이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에 씻겨 지금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적벽강은 흘러내리던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며 굳어버린 채 지금 모습이 형성된 것입니다. 제주도 주상절리대처럼 말이죠.
삼십여 년 전 일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격포 이곳으로 졸업여행을 온 적이 있습니다. 역시나 겨울을은 쌀쌀했었고, 특히 바닷바람은 매서움이 보통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눈까지 내리니 겨울, 그리고 바닷가, 격포항 모습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가슴을 시립고 거칠게 하였었지요.
삼십여 년의 세월 흐른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 격포로 떠난 졸업여행은 내 어린날의 슬픈 방점이었던 때였습니다. 그 길로 나는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로 무작정 상경하였고, 창신동, 구로동, 청파동 골목에서 부대끼고 치이며 이십 대 한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지금도 부안 근처를 지나가기라도 할 때면 그 시절 기억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지만 지워지지도 않는 기억입니다.
격포 여행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은 닭이봉 전망대에 올라보는 일입니다. 전망대에 오르면 격포 시내뿐만 아니라 서해바다와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닭이봉은 닭의 벼슬을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강원도 정선과 충북 옥천에도 닭이봉이란 산 봉우리가 있습니다. 그 외 북한에 있는 산 등 우리나라 곳곳에 동일 이름의 산들이 많습니다.
격포 닭이봉은 채석강을 감싸고 있는 낮은 봉우리입니다. 하지만 정상에서 보이는 격포 앞바다 풍경은 한 폭의 그림입니다.
적벽강과 채석강을 둘러본 후, 해질 무렵 닭이봉에 올라 유적(幽寂)한 바닷물에 비단결처럼 수놓는 서해의 일몰을 보고, 내려와 어시장에서 간단한 안주거리 마련하여 방파제 아무 곳에서나 주저앉아 소주 한잔 기울인다면 여독은 충분히 풀리고도 남을 것입니다.
바다를 그윽이 내려보며 조용한 숙박을 원한다면 궁항 부근을 추천합니다. 산구비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격포와 궁항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격포는 여행객들로 인해 사시사철 북적대지만 궁항은 여느 작은 어촌마을처럼 늘 조용합니다. 최근에서야 산비탈 따라 듬성듬성 펜션이 들어서면서 찾는 발걸음이 늘었지만 그래도 격포에 비해 한적한 편입니다.
산 중턱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눈 뜬 이른 새벽 궁항 방파제를 걸어봅니다. 너무 일러서 일까요? 작은 고깃배도 잠들어 있고 마을도 아직은 잠들어 미동도 없습니다. 들리는 건 파도 소리뿐. 장승처럼 서있는 삼색 등대가 이채로운 궁항 해변은 한적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른 시간에는 느리게 관찰할 수 있는 여행의 또 다른 묘미가 있습니다. 길 위로 올라온 배도 기웃거려보고 방파제 끝에서 부서지는 포말을 쫓기도 합니다. 키 낮은 마을 집들과 골목길도 거닐어봅니다.
이렇듯 느리게 걷다 보면 소소한 사물까지 눈에 들어옵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작은 꽃들도 보이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낡은 어망도 눈에 들어옵니다.
흐르는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고는 하지만 실제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늘 일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이야 늘 바쁘고 정신없이 보낼 수밖에 없다지만 일상을 벗어난 여행에서 만큼은 시간의 흐름과 보폭을 맞춰 걷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보이지 않던 풍경까지 볼 수 있고 그 풍경들로 인해 마음이 즐거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안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하룻밤 정도는 궁항 부근 산비탈 펜션에서 머물다 가보시길 권합니다. 여명보다 먼저 열리는 바다와 그 바다 위에서 목가적 풍경을 연출하며 지나는 배 한 척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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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격포는 해안가에 바위가 책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채석강과 적벽강으로 유명하다. 인근 변산반도 국립공원과 더불어 부안 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새만금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변산반도 그 끝에 적벽강과 채석강이 있다. 닭이봉에서 맞는 낙조는 격포 여행의 숨은 명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