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정토(淨土)는 선암사 오르는 길에 있었다. 나이를 가름 키 어려운 고목과 그 사이사이를 자유자재로 이 채워내는 수풀, 조르륵 때로는 콸콸 흘러내리는 계곡물, 필 때가 되면 피어났다 질 대가 되면 미련 없이 거두는 꽃들, 걸림 없이 그리고 여여하게 살고 있는 이들이 곧 부처였고 이곳이 곧 정토였던 게다.
이들과 어우러지려 승선교는 묵언수행 중이고 절마당 매화는 제 살 떼어내듯 열매를 떨궈내기도 하며 만행(萬行)을 한다. 담벼락의 경계 역시 사람의 욕심일 뿐 바람처럼 자유로이 새들은 넘나들고 방황하던 홀씨는 위태하지만 기왓장에 자리 잡고 뿌리내렸다.
존재하는 사물들은 이렇듯 스스로가 경계 없이 살아가는데 오직 사람만이 무수한 경계를 만들며 산다. 사방이 온통 문(門) 없는 문(門)인데 애써 그 문에 대문을 달고 빗장까지 채워댄다.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어 그 속에 스스로 갇히어야 비로소 편안해한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다 보니 삶이 늘 고루(固陋)할 수밖에.
부처님 전에 머리 조아리고 사정 좀 하려 했더니 수(手) 쓰지 말라는 듯 법당마다 스님네들 자리 꿰차고 앉아 염불삼매 중이어 결국 법당 문지방을 넘지 못한다. 이 또한 근기 약한 내가 저 스스로 만든 찰나의 경계이려니.
일부러 느릿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선암사 경내에서는 저절로 발걸음이 늦춰진다. 켜켜이 나열된 절집과 그 사이를 채워내는 풀 나무의 조화가 절묘하여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까운 모습들이다. 이러한 풍경을 눈에 담다 보면 발걸음은 시도 때도 없이 멈춰 서고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된다. 마치 미로 속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착각마저 들게 할 만큼 선암사 경내는 오밀조밀하면서도 모나지가 않다.
오신 적 없이 부처는 오셨었고 가신적 없이 부처는 가시 었다. 오고 감 역시 내가 지어낸 허상일 뿐 실체의 세존께서는 당신 삶을 사시다가 때 되니 떠나신 게다.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 아닌 우리 인간들처럼. 다만 끄달림없이 자유자재로 이. 그리고 길을 내 보여 주셨다. 경계 없이 사는 법을.
절마당에 담뿍 피어난 불두화를 보며 '꽃도 저처럼 부처 닮으려 애쓰는데 나는 무엔가' 다시금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불현듯 자성(自性)이 본래 부처라며 내 어머니처럼 다독여 주시던 십 수년 전의 큰 어른이 아른거린다. 한 시절을 지척에서 공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겐 크나큰 복이었는데 오늘, 참 많이 아쉽고 참 많이 그립다.
by 黃 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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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조계산에는 한국불교에서 중요한 위치의 송광사와 선암사가 승용차 기준 20여분 거리를 두고 동서로 있다. 송광사는 16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로서 출가자들의 근본도량이고 선암사는 태고총림의 총본산인 사찰이다. 두 사찰 모두 유서 깊은 역사만큼 많은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으며, 사찰 건물들과 어우러진 경치 또한 수려하다.
특히 선암사 오르는 길에 만나는 아치형 돌다리 승선교는 국내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홍교로서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풍경을 자아낸다.
이왕 선암사와 송광사를 여행하러 가시려면 지척에 있는 낙안읍성까지 연계하여 둘러보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