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준혁 Jun 03. 2021

이 길의 끝은 상관이 없다

제주 어느 날

이 길의 끝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무계획으로 떠나온 제주 스쿠터 여행, 숙소에서 뒹굴거리며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가고 싶은 곳을 정해 떠난다.
날이 흐린 날 이었다. 바람은 거세게 불었지만 파도는 잔잔한 날 이었다.
휴무였던 책방이 문을 여는 날이라, 책방에 들러 책을 한 권 샀다. 마땅히 앉아서 읽을 곳이 없기도 했고, 일단 바다로 가자 싶어 바다 쪽으로 스쿠터를 내달렸다. 어디에 자리 잡아 볼까 천천히 달리다가, 문득.
이 길의 끝까지 달려보기로 했다.


이 길의 끝에는 뭔가 거창한것이 마중해줄 줄 알았다.
인적 드문 고즈넉한 항구라거나, 아름다운 빨간 등대가 있거나, 멋드러진 절벽에 다다르거나.
내 안에 울림을, 깊은 감동을 줄 무언가가 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길의 끝에는 세속적인 가게들이 즐비한 작은 마을이 있을 뿐 이었다.
세속을 떠나 온 제주였는데, 그 끝은 세속 이었다.


잠시 허무에 젖었지만 그 뿐 이었다.
길의 끝 까지 달리는 중 에는, 고요의 바다를 배경으로 고요한 노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인적 끊긴 어느 절벽 아래에서는 파도와 나만이 존재해보기도 했으며 어느 작은 숲길에서는 아기새의 친구가 되어보기도 했다. 달리는 중 온 몸을 감싸는 바람과 바다향이 너무 좋아, 덜컥 눈을 감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시선 닿는 발길 닿는 모든 것들이 아름웠다.


이 길의 끝이 세속인건 아무 상관이 없다.
또 다른 길의 끝까지 내달리며,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담아가고 싶다.
또 그 길의 끝 역시, 세속인건 아무 상관이 없다.


얼마 전 흐린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글을 썼다.
흐리고 파도가 잔잔한 날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난 보답하듯 반짝여야 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