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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준형 Jul 14. 2021

'정의'의 새로운 정의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살펴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정의의 필요성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의 명강의는 21세기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거쳐온 우리 사회의 화두는 이제 ‘공정과 정의’ 일만큼, 최근에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20 트렌드 코리아’라는 책을 읽어보았는데, 2020년의 핵심 화두 중 하나를 “Goodness and Fairness(페어플레이)”로 꼽을 만큼 이젠 공정과 정의가 하나의 트렌드와 시대의 흐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다양한 측면의 정의가 있겠지만, 나는 ‘공리주의에서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이 옳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민주주의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는 다수결의 방식과 비슷하다. 우리는 무심결에 다수의 의견과 다수가 원하는 행복의 방향에 따라 선택을 하고 생활해 나가고 있다. 사회에서는 공리주의적 선택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가운데, 내가 ‘공리주의가 과연 정의로운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4차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한 급속한 기술 발전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보면서부터이다.


평소에 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나갈 미래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고, 첨단 기술에 대해 신문을 읽으며 찾아나가길 좋아하는 나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이 만연한 미래사회에서는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조건적인 인공지능 개발을 해야 하는 것일까? 다수의 삶이 편리해질 수 있다면, 윤리적인 문제 발생하더라도 기술 개발을 지속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편리함과 행복을 좇는 인간은, 기술로 인한 편리함과 도덕적, 윤리적 문제들과 갈등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 복제를 통해 장기를 얻을 수 있다면 ‘불로장생’ 만큼이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지만, 그만큼 생명 윤리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이 보다 많은 개인화된 데이터를 학습하여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편리하겠지만, 정보 수집 과정에서의 사생활 침해와 같은 기본권 보장의 분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욕구와 도덕적 기준의 갈등이 심화되는 미래 사회에서는, 우리의 이성적 사고에 기반을 준 도덕적 의식이 중요할 것이다. 즉, 다수가 추구하는 방향이 좋은 방향이 아닌 경우가 많이 발생할 수 있고, 그때마다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결정을 하게 된다면 기본적인 윤리적 문제는 지켜지지 않은 채, 편리함만 쫓게 되어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파국을 맞을 수 있다. 그래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토의해보고자 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도 되는가?'라는 주제로 진행한 토론에서, 나는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강조하였고, ‘공리주의’라는 명목 하에 개인 정보 침해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침해당할 수 있게 된다면 공리주의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악용되는 사례 또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래 사회를 예측하자면, 공리주의로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특히나 더 위험하다.



고대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을 사자에게 던지는 행위.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범죄 용의자를 고문하는 것. 도시 전체를 위해서 한 아이가 방치되어 희생당하는 것. 3명의 선원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17세 소년 리처드 파커를 살해하여 식인을 감행한 미뇨넷호 사건. 다수가 소수에게 가해 행위를 하는 각종 사회적 폭력.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정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위의 상황들이 정당한 것일까요? 언뜻 보기에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허점이 매우 많습니다.


공리주의의 어원은 Utility, 즉 효용입니다. 효용인 큰 방향으로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효용에 따른 선택의 ‘결과’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리주의가 무조건 소시오패스는 아니지만, 효용적인 생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소시오패스의 기본적인 성격"이라며 "공리주의가 만연한 사회는 소시오패스적 사회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도 공리주의의 가장 큰 약점이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만족의 총합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개인을 짓밟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게 된다면 범법적인 행위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판단되는 행위들이 모두 정당하게 됩니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적절한 기준 없이 그저 ‘행복’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신체적 폭력, 사이버 폭력 등 다양한 사회 폭력이 정당화되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가해자가 ‘행복’했다면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인간 모두에게 평등하게 존재하는 ‘권리’는 존중되지 않고, 다수의 횡포에 의해 잔혹하게 짓밟히고, 억압당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저희는 공리주의적 사고 자체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리주의적 판단을 하더라도,  공리주의로 인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효용에 따른 결정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효용에 바탕을 둔 결정을 하더라도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불확실한 기준을 가진 공리주의라는 명목 하에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부당한 사례가 없어지고, 다수의 행복이 추구하는 비도덕적인 행동이 정당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계 인권선언과 헌법 제10조에 명시된 개인의 권리는 그저 다수의 행복으로 인해서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권리입니다. 따라서 저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공리주의적 사고는 많이 보편화돼있기 때문에 이를 아예 부정할 수도 없다. 공리주의는 분명 장점도 가지고 있기에 각 방식의 장점과 단점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리주의가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리면서도, 다수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도록 사회의 각 구성원들이 모여서 협의하고 토의하는 시간을 가지거나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 등의 노력을 하면 더 좋은 방식이 될 것 같다.


정의란 무엇일까?

앞으로 우리 모두가 가슴속에 새겨야 할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정의’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만약 우리의 진보나 발전이 ‘정의롭지 않다’ 면 우리는 과감히 방향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대, 성별, 종교, 정당, 사상을 뛰어넘어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책의 말미에 언급했던 것처럼, 미래 사회는 모두가 ‘공동선’과 ‘정의’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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