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과학기술'의 세계, 이제는 미디어가 변해야 한다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과학기술'의 세계, 이제는 이를 나타내는 미디어가 변해야 한다
우리는 평소에 재현된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간접적으로 미디어에 의해 구성된 장면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실로 여긴다. 여기서 미디어란, 좁은 의미로 메시지를 담아 나르는 운반체를 의미할 뿐 아니라, 넓은 의미로 간접경험을 구성하는 '매개하는 것'을 총칭한다. 우리가 특정한 사건을 인식하기 위해 거치는 모든 것이 '미디어'이므로, 우리는 미디어로 포화된 세계를 매일 경험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생각하는 미디어, '영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건과 우리를 매개하는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하는 영화는, 단순히 인간에게 순간적인 유희를 제공하는 매체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당대의 사회 모습과 그 사회의 신념과 가치관을 반영하기도 하며, 반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나 개념을 제시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많은 사건과 현상을 파악하고 그에 기반하여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 이미지'(김명진, 2004, 한국 과학기술학회 학술대회)라는 논문에서는 영화에서 드러난 과학자와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 논문에 따르면 많은 영화가 과학기술로 이루어진 사회를 '디스토피아'로, 과학자를 어리석고 무기력한 냉소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로 인해 극단에 위치한 두 계급으로 나뉘는 사회를 표현하거나, 지배-피지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감시체계가 등장하는 모습, 그리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상대로 반항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모습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과거에는 이처럼 과학기술이 그리는 사회를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등과 같이 극단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그려낸 기술의 모습은 먼 미래의 얘기와도 같았고,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상상 속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으로 촉진된 ICT(Internet and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발달로 인공지능(AI), 5G 통신, 드론과 로봇,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 자동차 기술들이 우리 삶 속으로 깊숙이 자리 잡기 시작하며 현실화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제는 과학기술로 둘러싸인 현실 세계가 더 이상 구경거리화, 스펙터클 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과거의 모습과는 명확히 구별된다.
이제는 영화와 같은 미디어가 나타내는 과학기술 이미지가 변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미래 사회를 통찰력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미디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기술을 소재로 하는 영화 또한 기술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를 극단적으로 묘사하거나,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폭력적, 무기력하게 나타내어 기술의 단편적인 모습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계속해서 부정적이기만 한 상황들로 재현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무조건 회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거나, 공포심을 느끼고 불안해할 수 있다.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왜곡된 현실이 곧 사실이고, 실존하는 현상과 사건이라고 믿게 된다면, 이는 개인의 사회를 통찰하는 관점을 편향적으로 바꿀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하다.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과학기술의 미래를 근거 없이 부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와 발전을 저해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할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무턱대고 긍정적으로 그려내자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와 긍정 또한 과학기술의 이면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여 기술이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악용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궁극적으로 미디어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방향은 '사실(fact)'에 기반한 사건의 재현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의 입장과 관점에 편향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사건을 전달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관점에서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와 같이 아무리 창의력에 기반을 둔 미디어라고 하더라고 최소한의 '사실'에는 부합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과학기술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묘사할 때 모두 현재 상황에 적절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미디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미디어를 통해서든, 사람들이 정확한 '사실(fact)'을 인지할 수 있어야만 그에 따른 개념과 일반화를 통해 '지식'을 획득할 수 있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각자의 객관적인 관점을 형성하여 사회를 편향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다.
과학기술과 우리는 이미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기술의 혁신이 거듭됨에 따라 우리 사회는 점점 기술로 둘러싸이고 있다. 필연적인 사회의 혁명적인 변화에 따라,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술과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며, 기술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각자의 관점과 통찰력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는 사건을 재현하는 '미디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미디어는 어떻게 과학기술을 바라봐야 하는가.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모습을 얼마만큼 신뢰 혹은 경계해야 하는가.
매개된 현실, 즉 '시뮬라크르'를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