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을 산책길에서 만난 풍경들

by JUNI KANG

이번 추석 명절 내내 하늘은 회색빛 장막을 드리운 채 끊임없이 비를 쏟아냈다.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축축하게 젖은 세상이 보였고, 마음마저 눅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랜만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펼쳐졌고, 햇살은 마치 오래 기다려온 친구처럼 반갑게 창문을 두드렸다.


이런 날 집 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밝은 햇살에 이끌려 나는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밖으로 나섰다.

가을 햇살은 여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은 조금 따가운 기는 남아있지만 한여름의 뜨거움은 아니었다.

거리의 나무들은 조금씩 가을 빛깔로 물들기 시작했고, 바람에 실려 오는 공기는 상쾌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햇살을 따라, 바람을 따라 걷는 산책. 이런 여유가 얼마 만인가 싶었다.


한 20분쯤 걸었을까.

어느새 옆에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었다.

그는 이어폰을 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이려니 했는데, 우리의 보폭이 비슷했던 탓에 자연스럽게 나란히 걷게 되었다.

"응, 그래... 오늘은 날씨 진짜 좋더라. 너도 밖에 나와봐..."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원래라면 누군가의 통화 내용이 들리면 불편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거슬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듣고 있으면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다정했다.

목소리 톤이 얼마나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지, 누구와 통화하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여자 친구에게 건 전화임이 분명했다.

"아니야, 살짝 더워. 그냥 티에 가디건 하나면 될 것 같아..."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가득 섞여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만 있는 그 특유의 온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모르는 척 앞만 보고 걸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참 좋은 시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 사랑이 전부였던 그 시절. 전화기 너머 목소리만으로도 하루가 행복해지고, 함께 걷는 산책길이 온 세상인 것처럼 느껴지던 그때. 그 남자도 지금 그런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폰 너머 여자 친구에게 날씨를 묘사해 주고,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혼자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갈림길에 다다르자 그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행복한 순간을 살짝 엿본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계속 걷다 보니 이번에는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가 유모차를 밀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유모차 옆으로는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기가 아장아장 걸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동생을 봐주고 있나 보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님이 바빠서, 착한 언니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나온 걸 거라고 말이다.


그때였다. 아장아장 걷던 아기가 그 어린 여자를 향해 "엄마!" 하고 불렀다.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엄마? 저 어린 사람이 엄마라고?

분명 중·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아직 어른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소녀의 얼굴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소녀가 능숙하게 유모차를 밀고, 아기의 손을 잡아주며 “천천히, 천천히” 하며 걸음을 맞춰주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았다.

어린 걸까? 어려 보이는 걸까?

어쩌면, 아직 어린 그 사람이 이미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그 어린 엄마의 뒷모습에서는 나름의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아이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는 그 모습. 그것도 어떤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한참을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 얼굴에는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오늘 산책에서 나는 두 가지 풍경을 만났다.

사랑이 한창인 젊은 남자와, 사랑을 돌보는 어린 엄마.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추석 비가 그치고 찾아온 화창한 날, 2시간의 산책은 그렇게 내게 작은 미소를 남겼다.

인생은 저마다의 속도로 흘러가고, 사랑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을 햇살이 아직은 뜨거웠다.



2025.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