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효과 - 05화
다빈이. 다빈이.
지난겨울,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어둑한 주차장 뒤편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알았어. 그야 그렇지만 네 애교는 다들 인정해 주는 거잖아. 그걸로 밀어붙여 봐. 너는 애교가 많아서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하는 거잖아. 그래. 지금 나 집 앞이야. 들어갈 거야. 응. 잘 자. 아, 잠깐만… 다빈아!"
그날 처음으로 '다빈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갑작스레 이유 모를 불안이 밀물처럼 밀려와, 차디찬 주차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남편이 어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며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모른다.
짧은 순간, 참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요일마다 출근한다고 나간 것이 다빈이라는 여자 때문이었을까. 퇴근 후 귀가 시간이 늦어진 것도 다빈이 때문이었을까. 와이셔츠에 묻어 있던 것은 혹시 립스틱 자국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들이 빠르게 얽히고설키며 여울져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편에게 트집 잡힐 일을 만들지 말자고, 아닐 거라고, 남편을 믿어 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별일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빈아. 사랑해!’라는 글자가 점점 커지며 빙빙 돌더니, 눈앞을 가득 메웠다.
수백 미터 지하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그 소리는 귓속에서 계속 맴돌며 점점 커져 머릿속을 습기 먹은 자갈로 가득 채워 갔다.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울컥,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지난 세월 남편과 알콩달콩 애틋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큰소리로 싸워 본 적도 없었다.
한없이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는 느낌과 패배감, 배신감이 절묘하게 뒤섞여 비참하고 처절하게 한꺼번에 몰아쳤다.
결국 목구멍 가득 뜨거운 것이 차올라 입 밖으로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크흐흑……."
울음소리에 놀란 세희가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엄마! 울어?"
순간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낮게 말했다.
"아니야. 세희야. 아빠 차에 가 있어."
아이는 엄마의 울음에 놀라긴 했지만, 가족끼리 놀러 간다는 생각이 더 컸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마트폰 액정을 엉덩이에 쓱쓱 문지르며 신발을 신고 나가 버렸다.
자동차에 짐을 옮겨 싣고 올라온 남편은 그때까지도 통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의 ‘내려가기’ 버튼을 눌러 두었다.
"그러면 일단 데이터를 이미지로 백업하고 나서 시작해……."
다른 짐을 들고나가려다,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는 나를 보고서야 남편은 흠칫 놀라 통화를 멈췄다.
"잠깐만, 좀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자마자 딩동! 딩동! 두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남편이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다빈이가 보낸 문자였다.
오빠,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해. 큰일 났어. 전화해 줘!
전화 좀 받아. 아무래도 봉투가 바뀐 것 같아.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메시지를 읽던 남편은,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목덜미에서 등줄기까지 면도날에 베인 듯 뜨끔하며 뜨거운 불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현관문 앞에 놓인 여행용 캐리어 위에 주저앉아 토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남편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기만 했을 것이다.
그때 세형이가 뒤뚱거리며 맨발로 현관문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세형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추추가 쪼르르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조용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