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니가 예뻐졌다 (2)

시린 조각들

by JUNI KANG


세월이 흘렀다. 영원할 것 같던 고난의 시절도 결국은 지나갔다.

그리 풍족하지는 않아도 우리 부부가 먹고살 만큼은 되었고, 이따금 남편과 손잡고 동남아로 여행을 다니며 노년의 여유를 즐길 정도는 되었다.


언니의 생일잔치를 치르고 며칠 뒤, 남편과 늦은 아침을 먹다가 문득 그날의 이야기가 나왔다.


“여보, 그날 보니까 언니 정말 예뻐진 것 같지 않았어?”

“그러게, 뭔가 좀 환해지고 좋아졌던데. 맘이 편해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니, 그런 거 말고. 얼굴 자체가 좀 예뻐진 것 같지 않았냐고.”

“음…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깨끗해진 것 같기도 하네.”

“혹시 뭔가 고친 거 아닐까? 아님, 보톡스? 필러? 아이백 제거?… 모르겠네.”

“비싼 화장품을 쓰나 보지.”

“그래, 맞지? 아무튼 좋은 화장품을 쓰니까 다르긴 다른가 봐.”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꾹꾹 눌러두었던 옛 기억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그 샘플 화장품 때문에 혼자 화장대 앞에서 울던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놓았다. 이야기하다 보니 그때의 처량했던 기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한동안 접어두었던 이야기를 다시 마주하니 울컥하고, 그때의 서러움이 밀려오며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단순히 화장품 때문이 아니라,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느꼈던 지독한 고립감과 서러움에 대한 뒤늦은 눈물이었다.


한참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남편이 내 눈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그래, 궁금하면 언니한테 뭐 바르냐고 물어봐. 내가 그거보다 훨씬 더 좋은 걸로 사줄게.”

남편의 그 살가운 위로가 서러웠던 마음 위로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아니, 그거 주면서 스킨 하나 새로 사서 보내주지. 진짜 샘플만 잔뜩 보냈어? 서운했겠다.”

내 이야기를 듣던 남편이 조금 화난 투로 거들었다. 그의 편 가르기에 괜히 마음이 든든해져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나도 그때 그런 생각했었어. 나 같으면 새것 하나 사서 같이 넣어줬을 거야. 아무튼 그 샘플은 중간쯤 쓰면 내용물이 잘 안 나와. 그래서 손바닥에 대고 탁, 탁 쳐야 하거든…”


나는 오른손에 조그만 샘플 병을 들고 왼손 손바닥에 거칠게 치는 흉내를 냈다.

“그렇게 손바닥을 탁탁 치며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무 서글퍼지는 거야.”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그 동작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비참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딱히 처량할 일도 아닌데, 그때는 그게 내 처지를 확인시켜 주는 낙인 같았다.


화장하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수많은 샘플 화장품이 모두 바닥을 보일 때까지, 매일 아침 손바닥이 아프도록 두들기며 사용했고 그 비루함에 마음은 더 가난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주는 사람의 선의가, 받는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식사했다. 내가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고 남편을 보니, 그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남은 밥을 입에 넣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

“샘플 화장품이 사람을 참 슬프게 만드네.”

남편은 씁쓸하게 웃으며 물컵을 들었다.


나도 따라 맥없이 웃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여보, 돌이켜 보면 그렇게 울컥하던 순간들이 몇 개 더 있어. 내 자존감이 깎여 나가는 것도 서러운 일이었지만, 엄마라는 이름을 달고도 아이의 세상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절망이었거든. 그중에서도 자꾸만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식사를 마친 남편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예린이가 다섯 살 때였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그때의 봄날로 돌아갔다.

“그때 예린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했는데, 당장 그 다달이 내야 할 원비가 없어서 보내질 못했지요. 아래층 친구 엄마가 같이 보내자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차마 돈이 없어서 못 보낸다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내년에 보낼게’ 하고 말았어요.”


남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같은 동네 사는 친구들이 모두 유치원 가방을 메고 나갈 때, 예린이 혼자 아파트 화단에서 흙장난하며 놀고 있었어요. 그때가 4월 봄이었는데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줄을 지어 소풍 갔다가 돌아오는 광경을, 예린이가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목을 길게 빼고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베란다에서 그 뒷모습을 내려다보는데, 가슴이…”


목소리가 점점 떨려왔다.

“그런데… 아래층 할머니가 베란다에 앉아 예린이의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혀를 차는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려오는 거야. ‘에이그 쯧쯧… 저 어린것이 얼마나 같이 가고 싶었을꼬… 에이그 가여워라… 쯧쯧쯧…’”

목이 메었다.


남편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할머니가 혀 차는 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정신없이 뛰어 내려갔어요. 밖에서 혼자 서 있는 아이를 낚아채듯 안고 집으로 들어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돼서, 그 어린것한테 부러움을 먼저 알게 한 것 같아서…”

아래층 할머니의 애틋함이 오히려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 어렸던 아이는 지금은 성장을 해서 제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는데도, 나는 이때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들과 함께, 우리가 함께 건너온 그 시린 세월의 파편들이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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