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고구마 향 커피를 마신 날

말 없는 위안에 대하여

by JUNI KANG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동 소리만으로도 달갑지 않은 그 사람의 전화가 울렸다.

안부 인사조차 생략한 채 본론으로 직행하는 일방적인 목소리.

그는 무언가 막힐 때면 습관처럼 나를 찾았다.

특히 컴퓨터 설정이 꼬이거나 엑셀 수식이 엉키면, 마치 내가 고장이라도 낸 양 다짜고짜 짜증부터 쏟아냈다.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그가 내뱉는 짜증의 본질은 기계의 결함이 아니라, 스스로의 낮은 업무 역량을 감추기 위한 방어였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그 무거운 짜증을 고스란히 묻혀 나에게 떠넘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랜 세월 알고 지냈다는 ‘인연’의 굴레에 묶여, 아무런 보상도 없는 그의 일을 묵묵히 처리해 주었다.


그렇게 수정한 파일을 메일로 보내고 나면 그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씁쓸했다.

그는 참으로 상대의 기분을 망치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 같았다.


이번에도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이끌고 나간 카페에서, 그의 투덜거림 섞인 두서없는 사업 이야기를 한참이나 들어주어야 했다.

나를 단 한 번도 이롭게 한 적 없는 관계임에도, 바보처럼 최선을 다해 대꾸해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젠가부터 커피를 마실 때면 이따금 은은한 고구마 향이 났다.

묘하게도 그 향은 늘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었다.

그 향을 맡은 날이면 어김없이 잠이 달아나 밤을 새우곤 하였다.


오늘 주문한 커피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그것은 마치 불면의 예고장 같았다.


짐작대로 잠은 저 멀리 달아났고, 시계 바늘은 어느덧 새벽 네 시를 가리켰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일조차 지겨워져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텅 빈 속과 마음을 달래려 주방으로 향하였다.


적막을 가르는 냉장고의 웅웅거림을 배경 삼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망설임 없이 꺼내 든 반쯤 남은 막걸리 한 통, 멸치볶음, 짭짤한 짠지무 무침.


모두가 잠든 이 시간, 그 허술한 상차림은 오롯이 나만의 위안이었다.


막걸리 첫 잔을 비워낼 때쯤, 정적을 깨는 ‘또닥또닥’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열여섯 살 노견, 가을이었다.


자다 깨어 화장실에 다녀오던 녀석이 멈춰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눈빛은 “빨리 화장실 바닥이나 치우라”는 부탁일까, 아니면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느냐”는 물음일까.


컵라면 앞에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나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그 깊고 느린 눈빛 속에서, 나는 문득 이런 음성이 들렸다.


“외로워?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어?”


억울한 불면의 끝에서 마주한 녀석의 시선은 낮에 겪었던 떫떠름한 만남보다 훨씬 다정한 위로가 되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측은함과 무언의 응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어떤 화려한 말보다, 나를 온전히 바라봐 주는 늙은 개의 깊은 시선이 더 지독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나를 필요로 할 때만 찾지만, 이 작은 생명은 그저 내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세상을 내어주었다.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며 깨달았다.

어설픈 관계에 상처받기보다, 지금 내 곁을 묵묵히 지키는 온기에 기대어 이 밤을 건너가야겠다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인간관계의 해답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무엇이 진정한 관계인지 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필요할 때만 안부도 없이 짜증을 앞세워 손을 내미는 이들을 언제까지 ‘인간관계’라는 이름으로 인내하며 유지해야 하는 것일까.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잠들지 못한 새벽,

컵라면과 막걸리 한 잔이 놓인 적막한 식탁 앞에서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때였다.


자던 자리로 돌아가던 가을이가 몇 걸음 걷다 멈추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 쪽으로 옮겼다.


내 발 아래 웅크려 자리를 잡는 녀석.


발등에 닿는 묵직한 온기 위로, 심란했던 밤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미소 하나가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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