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퇴근길, 현관 앞 (07)

미신의 그림자

by JUNI KANG


그날도 선미와 동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간식을 먹으러 나왔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선배…. 오랜만이네요.”

경하였다. 목소리에 술기운이 묻어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말투였다.

“나는 왜 가끔 선배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나만 그런 것 같아서 더 속상해요.”

“경하구나. 오랜만이네. 목소리가 술 마신 것 같은데, 어디야?”


민우가 옆에서 김밥을 먹고 있던 선미를 바라보았다.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오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선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처음 느껴보는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기, 영국.”

“영국? 아, 참. 너 유학 갔다는 얘기 들은 것 같네.”

“선배는 여전히 나한테 관심이 없네요. 하긴, 그래야 민우 선배답지만.”

“그래. 아무튼,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네. 저는 항상 잘 지내요. 여기 햇살이 너무 좋아서 잔디밭에 앉아 친구랑 와인 한잔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선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해 봤어요.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전화를 끊자, 나무젓가락을 든 채 가만히 김밥만 바라보고 있던 선미가 넌지시 물었다.

“누구예요?”

“응. 학교 후배. 예전에 내가 얘기해 줬던. 그 미신.”

“아. 미신.”

선미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다.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를 직감한 듯한 기분이었다.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강한 상대를 만났다는 느낌에, 선미는 슬며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민우가 선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러고는 남은 김밥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 나 미신이야. 미신을 믿지?”

민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예전 같으면 함께 웃어넘겼을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민우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가벼운 농담을 던졌지만, 그럴수록 선미의 마음속에는 경하의 목소리가 더 무겁게 박혔다.

“가자. 이제 들어가서 한 시간 마저 하고 오자.”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도서관 계단을 올랐다. 조금 전의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달래주듯,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철우는 인턴 기간을 무척 힘들어했다. 전공인 전자공학이 막상 실무와 맞닥뜨리자,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인턴을 마친 뒤 반도체 부서로 옮기게 되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거라고 그는 엄살을 떨었다.

그러면서 선미 곁에 민우가 있어서 다행이라며,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선미 역시 새로 맡은 프로젝트가 잘 풀리지 않아 고전하면서도 학업만큼은 악착같이 이어갔다. 한이 맺힌 사람처럼 계절학기마다 세 과목씩 해치우는 뚝심을 보여주었다. 민우는 그런 선미를 볼 때마다 자신보다 훨씬 어른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한여름의 뜨거운 날이었다. 철우가 졸업했다.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의 졸업식에 끝내 참석하지 못했다.

학사모를 쓴 철우를 사이에 두고 셋이 사진을 찍었다. 철우의 졸업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역시 선미였다.


교정을 걷던 선미가 민우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와, 나도 이런 곳에서 공부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캠퍼스를 바라보는 선미의 옆얼굴에는 오래 눌러 두었던 마음이 비쳐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민우와 눈을 맞추자, 민우는 말 대신 선미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던 철우가 웃으며 말했다.

“야, 날도 더운데 그만 좀 붙어 있어라.”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철우는 졸업한 후 정규직이 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팀장의 괴팍함으로 악명 높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소식을 들은 선배들은 하나같이 “너 이제 죽었다.”라며 혀를 찼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팀장은 회의 중 폭언을 일삼고 보고 자료를 집어던지기 일쑤였다. 한 번은 철우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더니 “이걸 보고라고 하니? 초등학생 방학 숙제냐?”라며 얼굴에다 서류를 집어 던졌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자료를 툭 던지며 내일 아침까지 분석표를 완성해 오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는 철우의 말에 팀장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것도 못 하면 회사를 그만둬야지.”

괴롭힘의 화살은 모든 팀원에게 향했지만 유독 철우에게는 더 날카롭게 쏟아졌다.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팀장의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하루는 상무가 철우를 불러 회사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다. 철우는 팀장 때문에 힘들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다음 날부터 팀장의 횡포는 한층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보고서를 제출하면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다시 해라"며 서류를 집어 던졌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느냐는 질문에 팀장은 "그냥 전부 다"라며 비웃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길이 지옥 같았다. 퇴사할까, 아니면 면상을 발로 차버릴까, 철우는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팀장과 상무는 고등학교 선후배였고, 상무가 끌고 들어와서 과장까지 승진시켜 놓은 인물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상무를 등에 업고 저지르는 만행에 다들 속수무책이었다.

울분을 삭이지 못한 철우가 민우를 찾아왔다. 셋이 모처럼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철우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선미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오빠, 그렇게 힘들면 부서를 옮겨 달라고 하든가, 아니면 그만두든가 해. 그러다 사람 죽겠다.”


철우가 잠시 가만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안 돼. 너한테 진 빚을 다 갚기 전에는 퇴사 못 해.”

철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빠. 그거 안 갚아도 되는 돈이야.”

“그런 게 어디 있니? 너도 나처럼 힘들게 벌었을 돈인데. 내가 죽기 전에는 그런 일 없어.”

민우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너무 힘들면 다른 직장도 같이 알아보자.”

하지만 철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 셋은 별말 없이 소주만 들이마셨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길거리에 가득했던 낙엽도 점점 줄어가고, 바람이 제법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철우는 점점 더 야위어 갔고, 선미는 저러다 오빠 죽겠다며 걱정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이삼일 간격으로 철우에게 전화했다. 밤에 야식을 먹는 시간이면 셋이 함께 통화를 했다. 그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가을의 끝자락으로 가던 어느 날, 학교에서 편의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경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잘 지내셨어요?”

“잘? 에휴—”

답답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왜요?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내 일은 아니고 친구가…”

민우는 답답한 마음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았다.

“어머, 그런 사람이 아직도 있네요. 친구분이 어느 회사라고 했지요?”

“TTC.”

“앗! TTC요?”

“왜? 아는 사람이 있어?”

“아니요. 친구분 성함이 ‘이철우’라고 했지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무엇을 알아본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며칠 후, 철우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야, 우리 팀장이랑 상무가 둘 다 지방으로 발령 났어!”

그날 밤, 셋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철우네 팀도 전체 회식을 하며 축제 분위기였다고 했다.


민우는 경하가 그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이 일을 철우가 알지 못하도록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경하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경하가 “선배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하고 묻던 모습이 비로소 이제야 머릿속을 맴돌았다.


민우와 선미가 철우의 걱정을 덜어낸 뒤 며칠이 지났다. 민우가 강의실로 가던 길에 선미의 전화를 받았다. 보통 이 시간에는 연락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오빠, 큰일 났어. 아빠가 쓰러져서 119에 실려 가셨대.”

늘 침착하던 선미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짙게 섞여 있었다.

“알았어. 내가 지금 회사 앞으로 갈게.”


전화를 끊고 정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택시를 호출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냈을 때, 검은 세단 한 대가 민우 옆에 섰다. 차에서 내린 검은 양복의 남자가 인사를 하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급한 일이시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민우가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하 님께서 보내신 차량입니다. 부담 없이 이용하시면 됩니다.”

“아니요. 택시를 부르면 됩니다.”

“제가 모시도록 해주십시오. 가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민우는 경하가 보낸 차라는 말에 커지는 궁금증을 안고 일단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타자,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순식간에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 차 안에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정적이 감돌았다.

“어디로 모셔 드릴까요?”

그의 목소리는 정중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목적지를 이야기하자 그는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는 낮게 말했다.

“출발하겠습니다.”

철저히 몸에 밴 정중한 태도였다. 다부진 체격과 단정한 복장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듯했다. 차는 도로 위를 흐르듯 달려 나갔다. 소음도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민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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