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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inArt May 06. 2021

가회동 기억들


북촌 언덕길, 가회 유치원과 성당

사진 출처 : https://thisgirlabroad.com/bukchon-hanok-village-seoul/

내가 초등학생이 아닌 국민학생 시절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올라 다니던 가회동과 삼청동을 잇는 가파른 언덕길은 북촌인가 하는 이름으로 서울의 관광 스폿이 되었다. 이때 삼청동에 살고 있어서 재동 초등학교로 가는 등하굣길이니 매일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 길은 어린 내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가파른 언덕이었다. 특히 오르막을 타야 하는 하굣길은 십자가가 아닌 책가방을 짊어진 나름 골고다 언덕 같은 곳이었다.  

그 길을 따라 안국동 방향으로 내려가자면 채소와 생선을 밖에 내놓고 팔던 동네 슈퍼며 핑크색 조명으로 고기를 잔뜩 진열해 놓은 정육점이 있었다. 여기까지 내려오면 가회 파출소가 있는 나름 큰길이 펼쳐지는데 오른쪽 방향에는 6년 동안 다닌 재동 초등학교가 있고 왼편인 삼청동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초등학교 다니기 전 예비 교육 1년을 받은 가회 유치원이라는 곳이 있었다.


초등학교로 진학하고 나서 문을 닫은  가회 유치원은  커다란 초록색 철문을 하고 있던 가회동 성당 안에 있었는데 마리아며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침마다 7:3 가르마를 타고 유치원을 갔었다. 규모는  않아 꾀꼬리 반과 종달새 반으로  가지 반이 있었는데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꾀꼬리 반이던 내가 종달새 반의 친구들을 "종알종알 거리는 종달새반~'"이라며 놀려대서 인듯하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가회동 성당의 수녀님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신부님들도 가끔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는데 가르침과 놀이의 대부분은 피아노를  치던 젊은 수녀님을 비롯한 수녀님들의 몫이었다.


이때 예비 교육을  받은 탓인지 국민학교 3학년부터는 돌아온 탕자가 되어 2 정도 가회동 성당에서 복사라는 것을 하였다.  신부님의 미사 진행을 돕는 일로, 가끔은 새벽 6 반에 시작되는 미사에 복사 노동을 위해 서울의 핫스폿이   새벽 언덕길을 책가방을 메고 걷곤 했다. 가회 유치원에서 쓰던 노란 빵모자를 가회동 성당 복사들이 쓰는 빨간색 모자로 바꾸어   가족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부터 일어나 어린 나이에 노동을 즐겼던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나의 가톨릭식 이름이 지어진 나름의 사건(?)도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기억이다. 그때 복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세도 받았는데 당시 대빵 신부님께서 우리 복사들에게는 세례명을 특별히 직접 지어 주셨다. 신부님 앞에 나란히 앉아있는 순으로 "그래 00은 요셉으로 할까?" 하면 "네" 하고 다들 얌전히 세례명을 받아들여 자연스레 가톨릭식 이름이 즉석에서 붙여졌다. 당시 내 또래 복사 아이들의 세례명은 대부분 요한이나 요셉, 야곱 같은  흔한 이름들이었는데 난 먼가 좀 세련된 이름이 갖고 싶었다.  내 차례가 되어 대빵 신부님께서 내게도 흔한 남자 성인들의 이름을 붙여 주려고 서너 번 시도를 하였으나 나는 용감하게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빵 신부님이 그럼 무슨 이름으로 하고 싶은지 물어보셨으나 어린 내가 아는 것이라곤 귀에 들어오지 않는 흔한 이름들뿐이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후끈거리는 얼굴로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옆에 계시던 수녀님께서 그럼 00 이는 미카엘은 어때? 하고 내 마음에 쏘~옥 드는 이름을 제안하셨고 나는 단번에 거부권을 철회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우리 가회 유치원의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미카엘이 되었고 복사 일을 하는 내내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누가 "0 미카엘~" 하고 불러주면 꽤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즐기던 노동은 어이없게 끝이 나버렸다. 요즘 한창 말이 많은 학폭 같은 사건이 당시 성당에서도 일어나서였다. 꼬맹이 복사들 사이에는 나름 서열이 있어 형들은 언제나 지적질을 잘했는데 그중에 말 모양의 얼굴을 가진 형이 꼬맹이 복사들이 미사 때 잘하나~ 모니터링하고 실수를 기록하는 일을 하여 그 결과로 주기적인 회의 비숫한 것을 했다. 그런데 웬일? 하루는 꼬맹이들을 꼬맹이 형이 모아놓고서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몽둥이를 가져와 실수한 벌점대로 일명 빠따질을 해댔다. 또래 복사들은 무슨 속죄의 심판이라도 받는 듯 다들 열심히 맞았는데 나는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았고 내 차례가 돼서 그 험악한 몽둥이가 엉덩이를 몇 차례 내려 치자 엉엉 울음을 쏟아냈다. 내가 울어버려서 어색하게 끝난 몽둥이 의식을 끝으로 나와 복사의 인연은 끝이 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가회동 가파른 언덕길을 내내 훌쩍이며 올랐다.


사진 - 이투에디 https://www.etoday.co.kr/news/view/1000335

그 꼬맹이가 울면서 가회동 성당을 나와 버렸어도 가회 유치원과 가회동 성당은 내게 기분 좋은 어릴 적 기억을 가져다주는 흑백 필름처럼 남아있다. 태어나 늦은 밤까지 집이 아닌 곳에 나와 있기가 처음이어서 일까? 밤늦게까지 성탄 행사를 즐기던 그때의  크리스마스가 어릴 적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다.

 

헐거운 나일론 소재에 언제나 촛농이 남아있던 복사복의 거칠던 감촉과 장례미사 때 등장하던 향로의 진하고 톡 쏘는 냄새며 수수한 데칼코마니 디자인을 하고 있던 아름다운 가회동 성당의 미사당 내부도 꽤 선명하게 기억을 차지하고 있다.

혈기 넘치던 복사형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둥글던 대빵 신부님도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겠지?

얼굴의 형상은 남아있지 않지만,  젊은 수녀님의 피아노 소리와 미카엘이라고 이름 지어주신 수녀님이 내 작은 등을 토닥여 주셨을 때의 따스함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는 꼬맹이 시절의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동경의 검푸른 하늘에는 비가 요란하다.

언젠가 서울에 가면 한적한 오후를 골라 가회동을 걸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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