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계절을 기록하는 실험실
News from Nowhere: Laboratory of Spring and Autumn Collection
문경원 & 전준호
SCAI THE BATHHOUSE (도쿄)
2025.11.5 – 2026.1.31
봄과 가을이 소멸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주 시작된 도쿄 야나카의 SCAI 더 배스하우스에서 문경원 & 전준호 작가의 듀오전
'News from Nowhere: Laboratory of Spring and Autumn Collection'
을 통해 그 모습을 잠시 경험하고 왔다.
도쿄의 가을이 땡땡하게 무르익은 이른 오후, 오래간만에 우에노를 찾았다.
이곳을 찾으면 항상 유원지를 찾은 기분이 난다.
우에노 동물원 때문인지 어린아이들과 젊은 부모들이 많고, 공원을 거닐러 온 일본인들은 물론 도쿄를 찾은 해외여행객들로 넘처나서 무슨 행사가 없더라도 페스티벌장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하지만 이곳 우에노는 일본 문화와 미술계를 움직이는 커다란 엔진과도 같은 곳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박물관인 도쿄 국립 박물관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고, 역시 일본의 미술관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개의 미술관인 국립 서양 미술관과 도쿄도 미술관이 좌청룡·우백호 마냥 국립 박물관을 주위로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일본 미술계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도쿄 예술대학도 이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에노를 찾을 때면 굳이 미술품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예술과 가까워진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우에노 역을 나서 도쿄 예술대학으로 향하는 짧은 길은 꽤나 낭만적이다.
야마노테선과 연결된 JR의 公園改札, 한국어로도 ‘공원 출구’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 로댕의 대형 작품이 놓여 있는 ‘국립 서양 미술관’과 대형 콘서트 홀인 ‘도쿄 문화회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를 가로질러 걷다 보면 곧 정면에 우에노 동물원이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에노 광장을 가로지르면 단층으로 된 단아한 외형의 스타벅스가 나온다.
이곳을 왼편에 두고 돌아서면 커다란 나무들이 들어선 작은 숲길이 이어지는데, 여기부터는 인파로 붐비는 우에노 공원과는 달리 한적한 마을로 접어든 듯한 분위기가 시작된다.
낙엽과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쌓인 이 짧은 길을 따라 걸으면 오른쪽에는 도쿄 음대, 왼쪽에는 도쿄 미대가 나란히 정문을 마주하고 있다.
악기를 등에 둘러멘 학생들, 커다란 캔버스를 들고 다니는 미대생들,
동네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풍경이 참 보기 좋다.
SCAI THE BATHHOUSE
도쿄 도심에서 잠시 한적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이곳은, 도쿄 미대의 졸업전시나 여러 행사들 덕분에 자주 찾곤 하지만, 근처에 일본을 대표하는 탑 갤러리 중 하나인 SCAI The Bathhouse가 있어서 발걸음을 더욱 자주 하게 된다.
아나카라라는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SCAI는 동네의 200년 된 목욕탕을 개조해 갤러리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코헤이 나와, 나츠시 사가와 같은 일본 인기 작가들과 이우환,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보스코 소디(Bosco Sodi) 같은 글로벌 스타 작가들을 리프레젠트하고 있으며, 국내외 굵직한 작가들의 라인업으로만 본다면 일본 최고의 갤러리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두 개의 계절이 존재하는 공간의 공기
여름과 겨울, 두 계절만 존재하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곳의 공기는 어떤 느낌일까.
빛은 차갑고, 강조된 금속의 질감이 묘한 무기력감을 내뿜고 있는 이색적인 공간이 펼쳐졌다.
어찌 보면 생명의 순환이 멈춰버린 듯한 풍경은, 이미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디스토피아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이번 문경원 & 전준호 전시는 '봄과 가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지구의 기후가 극단적으로 변하면서, 계절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시대.
이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계절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연구실에 보존된 ‘봄’과 ‘가을’을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듯 관찰하게 된다.
전시의 풍경은 먼 미래의 공상과학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미 시작된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겠다.
도쿄의 여름도 혹독함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지고 있다. 여름은 100일에 가깝고 8월은 적도의 세상으로 변하고 이 더위는 9월까지 계속된다.
문경원 & 전준호가 만들어낸 이 ‘계절 없는 정원’처럼 기후 변화 속에서 봄과 가을의 상실이 우리에게 무감각적으로 다가오는듯하다.
알루미늄 식물과 잔해들의 아카이브
이번 작품들은 대부분 알루미늄과 같은 금속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미 ‘생명’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매끈한 금속의 표면.
빛을 받으면 차갑게 반사되고, 가까이 다가가 보면 마치 문명의 잔해, 혹은 멸종된 자연의 화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들은 이러한 금속을 ‘기억을 운반하는 매개체’라고 설명한다.
이미 사라진 계절의 조각들을 물질에 옮겨 담고, 그것을 다시 실험실에 보관하고 기록해 놓은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컬렉션(Collection)’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작품의 모음이 아니라 사라진 계절과 인류의 문명을 보관하고 있는 실험실의 아카이브를 말한다.
기억하고 싶고 후세에 전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컬렉션'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광범위한 미로 확장되어 있다.
잠수함 혹은 배의 문을 실제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만든 대형 작품이 캔버스 작품처럼 벽에 걸려 전시되어 있었는데 개인적인 공간과 자금 사정이 허락된다면 당장이라도 집에 들이고 싶어질 말끔 매혹적인 작품이다.
혹시나 해서 작품 가격을 문의하였더니만 USD6만 불!
집에 들이고 싶다는 생각은 공상과학 영화와 같은 상상으로만 마무리!
이 정도 사이즈라면 집에 큰 부담 없이 걸 수 있을지 않을까.
봄과 가을과 함께 융화되어 소멸의 프로세스에 들어간듯한 문명의 물질이 외계의 생명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작품 가격은 3만 불 정도.
계절은 소멸되었지만, 문경원 & 전준호 작가에 의해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을 했다.
에코 비컨, Eco Beacon 이들은 플랑크톤처럼 바닷속을 표류하며 생명을 지킨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 상승과 염도 감소가 해류를 교란시키고 있다.
이에 대응해 에코 비컨은 해양 생물들이 길을 잃지 않고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 음파를 발신해 안내한다.”
발명가 : 문경원 & 전준호
봄과 가을이 소멸된 공간을 나서자 이내 가을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현실의 세계가 펼쳐졌다.
우에노의 가을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금속과 형광빛으로 둘러싸였던 미래의 그곳,
'News from Nowhere: Laboratory of Spring and Autumn Collection'
소멸과 세월 그리고 기억의 공간들로 다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두 명의 작가가 그려낸 소멸의 공간은 도쿄 우에노의 가을 풍경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도쿄 미술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