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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inArt Jun 20. 2021

쿠사마 야요이 할머니의 염력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쿠사마 야요이와 그녀의 작품 세계를 얘기할 때면 꽤 심각해지곤 하는 것 같다. 때로는 심리학 박사가 되기도 하고 누구는 정신과 전문의가 되어 그녀를 분석하고 재조립한다. 하지만 어렵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녀의 작품은 충분히 눈부시다.


지난해 여름 쿠사마 야요이의 전속 갤러리인 도쿄 오타 파인 아츠(Ota Fine Arts)에서 그녀의 작품 한 점을 구입해 집에 걸었다. 아무래도 이 할머니와의 인연을 오래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그녀와는 분명 인연이 있는 듯하다. 아니 그녀의 염력은 내게 잘 먹히는듯하다.


 13년 전 한국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이름이 미술 애호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그녀의 작품을 구하기 위해 반년 간 20회 이상 도쿄를 드나들었다. 그리고 간혹 그때의 출장길에 지금은 나의 아내 겸 보스가 되신 마누라상이 일본어 통역을 위해 출장길에 함께 하곤 했다. 포장은 출장이지만 사실 신나는 도쿄 여행이며 데이트였다. 그 후 나의 첫 전시기획도 쿠사마 야요이전이었는데, 그 당시 나름 많이 소장하고 있던 그녀 작품들의 현재 가격을 볼 때마다 혈압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고통이 아직 남아있지만 가치 환산이 불가능한 마누라상과의 인연을 쿠사마 할머니의 염력이 이어주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이렇게 시작된 쿠사마 할머니와의 인연을 좀 더 이야기하자면 제주도에 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은 쿠사마 야요이의 컬렉션으로 유명한 제주도 본태 뮤지엄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다. 아직 제주의 겨울이 남아있던 2014년의 이른 봄날, 박물관의 설립자이신 이행자 고문님께서 본태에서 쿠사마 야요이 기획전을 가질 계획이니 대구 시립 미술관으로 출장을 다녀오라는 지시를 하셨다. '헉 쿠사마 야요이?' 하고 속으로 깜짝 놀랐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본태박물관은 개관 2년째로 이제 막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발걸음이 조금씩 늘고 있을 때였다.  전시 공간도 확충을 해야 하고 신생 사립박물관에서 빅스타의 블록버스터 전시를 치를 수 있을지 덜컥 겁이 났다.  

한편 그때로부터 1년 전인 2013년, 대구 시립미술관은 쿠사마 야요이 기획전을 유치하여 관람객 33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었는데 나는 이 고문님의 말씀이 있으신 바로 다음 날 당시 대구시립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김선희 관장과 큐레이터들을 만나 자문을 얻고 본태에서의 전시에 협조를 요청드렸다.

 

본태 뮤지엄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의 나르시스 가든


본태 뮤지엄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의 Pumpkin & Polka dogs


본태 뮤지엄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의 Infinity Mirror Room과 회화 작품들



한여름에 오픈한  본태 박물관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 A Dream in Jeju의 전시 준비 과정은 혹독했다.

그 전시를 위해 박물관의 건물까지 추가로 지어야 했는데 박물관 신관의 신축공사로 시작된 전시 준비는 나름 본태의 총괄이던 나의 손에 하루가 멀다 하고 삽자루를 쥐여 주어 노동의 신성함(?)을 맛보게 해 주었고  쿠사마 할머니의 대형 작품들이 쉬지 않고 실려 들어올 때는 양복과 넥타이를 대신해 며칠을 흙 투성이 작업화와 목장갑을 착용하고 출퇴근을 하게 만들었다. 당시 이행자 고문님도 새벽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노동 인력으로 합류해야 하는 정도였으니 미술관, 박물관 직업이란 것은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아는 거친 노동의 현장이다.

본태 뮤지엄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의 개막식에 참석한 원희룡 지사, 나선화 전 문화재청장, 배우 강부자 선생


A Dream in Jeju의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대구시립 미술관에 이어 본태에서의 전시도 성황을 이루어 제주 산간의 조용하고 한적한 박물관은 모여드는 관람객들로 주변에 교통 혼잡이 일어날 정도였다. 거의 모근 직원들이 아침에 출근해서 사무실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나머지 근무시간 내내 박물관 이곳저곳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관람객을 맞이하여야 했다. 그야말로 매일매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2014년 8월에 시작된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은 제주의 여름과 가을을 나고 혹독한 눈바람이 시작되는 12월 초 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 전시가 막바지로 접어들 즈음의 11월의 어느 날, 쿠사마 할머니의 염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의 전시가 한창인 본태 박물관의 아름다운 야외 정원에서 멋들어진 웨딩 마치가 그것인데, 그 주인공은 바로 마누라상과 나였다. 물론 쿠사마 할머니가 하객으로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대형 작품들이 가득 들어찬 곳에서의 로맨틱한 웨딩 마치였다.

이날 웨딩의 하이라이트는 머니머니 해도 날씨였다. 행사가 시작되기 5분 전까지 부슬부슬 비가 내려 수중 웨딩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비구름아 이제 거치거라!”라는 주문에 하늘에 초대형 진공청소기가 등장하여 순식간에 비구름을 빨아드렸다. 그리고 곧 강렬한 태양이 내려쬐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상과학소설처럼 표현하여도 어색하지 않고, 지금 생각해도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시 우리 본태 직원들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었다. 쿠사마 할머니의 염력인지 염력이라면 웬만한 염력가들도 부러워하는 이행자 고문님의 염력 때문인지 아니면 두 분의 합작품인지 모를 일이지만 그날 바다가 아닌 하늘에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특별전 기간이어서 오랜 기간 박물관을 비우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탓에 신혼여행은 부산의 해운대에서 2박으로 대충 때우고 삶의 현장인 'A Dream in Jeju'로 서둘러 복귀했던 기억도 지금 생각하면 재미나다. 제주 사는 부부가 부산으로 허니문을 간다?


하여간 그렇게 120여 일간 진행된 '쿠사마 할머니의 특별 염력 전'은 제주 중산간 지역이 이미 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한 12월 1일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고 작품 철수가 시작되었다. 작품 철수에는 사흘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그녀의 전시를 위해 새로 지은 전시실에서 작품들이 하나둘 빠져나가 흰색의 전시실 벽의 면적이 점차 늘어나더니 마침내 마지막 작품이 커다란 트럭에 실려 박물관을 빠져나갔다. 큰 엔진음을 내며 힘겹게 언덕을 올라 점점 멀어져 가던 트럭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는데 당시에는 “쿠사마가 이제 가는구나! 살았다~” 하며 직원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멀어져 가던 트럭을 마냥 바라보던 건 아쉬움과 섭섭함의 감정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텅 빈 신관의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의 슬쓸함이 곧 시작될 제주의 겨울 풍경처럼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녀의 전시가 막을 내린 다음 해 봄, 3년간의 본태 박물관 근무를 접고 제주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쿠사마 할머니와의 인연은 제주의 본태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때 전시의 현지 코디네이터로 쿠사마 재단(YAYOI KUSAMA  FOUNDATION)에서 본태로 파견되어 고생을 함께한 오타 파인 아츠의 미녀 큐레이터 E상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롯폰기 화랑가에서 콧방귀 좀 뀌는 그녀와 유명 언론사 기자인 그녀의 남편은 우리 부부의 거의 유일한 도쿄의 술친구가 되어 자주 왕래하고 있다. 오타 갤러리의 직원들 중에서도 감히 쿠사마 야요이를 직접 만나러 다니는 몇 안 되는 그녀에게서 쿠사마 할머니의 근황을 살짝 엿듣곤 한다.


쿠사마 할머니의 염력이 우리 부부를 이어주고 결국은 그녀와 같은 하늘 아래인 도쿄로 불러들여 그녀의 측근까지 붙여주셨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멀리 간 걸까? 하여간 마누라상과 나는 지금 이곳 도쿄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건강히 그림을 그리시는 쿠사마 할머니/ 사진 - 오타 파인 아트

쿠사마 야요이 할머니는 현재 신주쿠의 모처에서 요양을 하시며 왕성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큐레이터 E상을 만나면 가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쿠사마 할머니 만나러 갈 때 무거운 그림이나 짐은 내가 다 들어줄 테니 나 좀 데려가 달라고 얘기하곤 한다. 쿠사마 할머니의 염력이 내게 당신과의 만남까지 허락할지는 모를 일이다.


쿠사마 할머니! 염력은 이제 할머니 건강을 지키는데 써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멋진 그림 많이 그려주세요~

그동안 아리가토~~


그리고 난 내일 그녀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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