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은 최고의 여행지
Home Sweet Home! 집 만한 곳은 없다!
첫 일주 정도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 생각을 했다. 그리고 3주째 접어든 어느 날은 멀쩡한 집 두고 이게 뭔 고생이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낯섦과 설렘을 찾아서 여행길에 나섰건만 정작 여행길의 목적은 포근한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것을 잘 배웠다. 도쿄로 돌아온 지 석 달로 접어드는 요즈음도 이 소중한 공간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다. 마누라상과 나로 이루어진 소가족의 쉼터이며 안식처인 우리 집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여행지다.
2. 한 달 살기의 집은 커다란 창문이 있는 곳으로
하얏트라는 브랜드에 신축한 지 1년 되는 깨끗하고 나무랄 것 없는 숙소이지만, 창문이 열리지 않는 곳에서 30일을 지낸다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폐쇄공포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으니, 호텔방의 창이 단단한 콘크리트같이 느껴졌다. 다행히 2주쯤 지나고 나서 뷰가 좀 더 좋은 방으로 옮기기는 했지만 열리지 않는 창에서 보는 경치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호텔이니 한 달간 청소도 안 하고 잘 차려놓은 조식 뷔페도 편하게 즐겼지만, 아무래도 장기간 머물기에 적당한 곳은 언제라도 커다란 창을 열어 바람을 만날 수 있고 욕심을 조금 더 부려 불어오는 바람에 바다향기가 살짝 묻어나고 새들이 조잘조잘 울어주는 그런 곳이라면 좋겠다.
3. 지방 소도시에는 차가 필요하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자동차의 필요 여부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대중교통이 잘 발달된 대도심과는 달리 소도시는 노선이 적고 차량의 출도착 간격이 길다는 것을 여행의 계획 당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주변에는 둘러보아야 할 멋진 자연경관들이 있기 마련인데 차가 없으면 이곳들을 찾는데 한계가 있다. 두 번은 기차를 타고 관광지를 찾긴 하였으나 가보지 못한 카타야마 마을과 시로요네 센마이다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왕 어딘가에 한 달간 살아본다면 기동성을 확보해서 이번 기회가 아니면 가보기 힘든 곳들을 부지런히 다녀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4. 식도락이 없는 여행?
금강산도 식후경! 이 흔한 말이 와닿았다. 여행지에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이란 여행의 목적이되기도 하고 심지어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새로운 맛을 즐기는 기쁨은 여행의 필수 요소다.
가나자와는 물이 좋기로 유명해서 스시를 비롯한 생선 요리는 물론이고 오뎅, 쌀, 사케 등을 맛보려 일본일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을 찾은 나흘째부터 코로나의 확산으로 식당에서는 술 판매가 중단되고 영업시간이 제한되어 상당수의 식당들이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문을 연 몇 곳들도 술을 팔지 않으니 반주 없는 저녁 외식을 할 줄 모르는 우리 알코올 부부에게는 금주령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소박한 이자카야나 아담한 스시집, 칵테일바 등에서 가나자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맛보기로 끝내야만 했고 몇몇 맛집은 점심에 찾아 간단하게 즐겼으며, 저녁은 주로 숙소에서 요리를 해 먹으며 반주를 했다. 맛난 것들을 잔뜩 남겨둔 채 돌아왔으니 다음번은 ‘식도락 가나자와’가 되어도 좋을 듯.
5. 코로나로 가능했던 한 달 살이
어딘가에서 한 달간 살아보려면 비용은 둘째치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서구권처럼 오랜 기간 휴가를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장기 여행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재택근무라는 신종 문화가 생겨 이번 여행이 별 휴가를 쓰지 않고도 가능했다. 한편으로는 식도락이 제한되고 유명 미술관과 공원들이 문을 닫는 맥 빠지는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니 당연지사다.
6. 눈 덮인 가나자와를 꿈꾸며
도쿄의 겨울은 서울에 비하면 비닐하우스 수준이다. 덜 추워 다행이지만, 좋아하는 눈 구경이 쉽지 않아 아쉬울 때도 있다. 눈이 귀하다 보니 3년 전에는 뉴스에서 폭설이 내린 화면을 보고 그 길로 신칸센에 올라타 유자와로 눈 구경을 간 적도 있다. 도쿄의 겨울에도 종종 눈발이 날리면 좋겠다.
반면, 호쿠리쿠 지역은 일본의 유명한 다설지역으로 니이가타와 더불어 가나자와의 설경도 유명하다. 이번에는 한여름 태양을 만끽했으니 이곳을 다시 찾을 때는 기왕이면 하얀 눈이 쉴 새 없이 내리는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
두툼한 스노 재킷에 모자를 눌러쓰고 방한용 장갑을 끼고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종종걸음으로 붉은 조명과 따듯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재즈바 보쿠텐까지 걸어 본다. 나이 지긋한 부부 주인장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추위를 녹여줄 Kenny Burrell의 Tres Palabras를 서둘러 신청하고는 보드카 마티니의 향을 입안 가득 넣어본다. 몸안으로 퍼져가는 알코올과 재즈의 선율에 금세 눈이 감긴다. 그러자 곧 시간이 멈춰 선다. 사방은 고요로 뒤덮이고 미동조차 사라지지만 재즈와 흰 눈발은 멈추지 않는다. 눈발은 더욱 거세져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다. 멈춰 선 도시의 차량과 행인들은 쌓여가는 눈에 차례차례 덮여가고 마침내는 커다란 빌딩들마저 자취를 감춘다.
이곳은 재즈와 눈만이 흐르는 북방의 설국.
꼭 잡은 우리의 손도 흰 눈 속으로 서서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