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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inArt May 11. 2021

일요일 산책과 설문 조사 용지


별 일정 없는 일요일은 마누라상과 도심 산책을 즐기는데 어제는 오후 3시쯤 집을 나서 토라노몬 힐즈(Toranomon Hills) 근처의 아타고 신사(Atago Shrine)를 다녀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웠다는 이 신사는 일본 사람들에게 '성공의 신사'로 불리는 곳이어서 시험이나 입사를 앞두고 지방에서까지 참배를 오는 유명한 곳이다. 우리 집에서는 가는 길도 좋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30여 미터 높이의 신사에 들어서면 도쿄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키다리 나무들이 기분 좋아 자주 들리곤 한다.


기분 좋은 산책 후 집으로 들어가기 전 우편함을 확인해보니 맨션 '자치 위원회'의 설문 조사지가 들어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소개하고 맨션 거주 관련하여 건의하고 싶은 내용은 기입하여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는데 별생각 없이 휴지통에 넣으려니 마누라상이 한번 읽어보자고 하여 나란히 식탁에 앉아 촘촘히 읽고는 결국 건의 사항을 기입하여 제출까지 했다. "야~우리가 이런 것까지 친절하게 제출을 다하네~이런 적극적인 참여 활동은 머지?" 하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우리도 모르게 '이곳 도쿄 생활에 은근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남의 나라에서 산지 6년이 되어가는 동안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여러 번 생각도 하고 느껴보기도 했지만, 사회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 터다. 하지만 나도 마나라상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변화는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작년에 받은 일본 영주권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얘기를 나누었다.


작년 6월 영주권을 받았다. 일본 이주 후 만 4년이 되는 때였는데 큰 필요에 의해 영주권을 신청했다기보다는 도쿄 생활이 우리 부부에게 잘 맞아서였다. 영주권이 나와 바뀐 재류카드를 받았을 때는 기분이 좋아 샴페인도 한 병 따고 했었는데 그 후 도쿄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 간의 소소한 느낌들을 정리해 보았다. 



1. 노후에의 안심감

2016년 도쿄로 이주할 때는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는 살아보자는 것이 계획이었으나, 3년 즈음될 때부터는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령 사회이다 보니 실버산업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고 '어딘가에서는 늙어가야 하니, 그곳이 우리와 잘 맞는 곳이라면 좋은 선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영주권을 신청하게 되었고 이제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곳의 노후 생활 선택지가 생겼으니 노후에의 안심감이 더해졌다.


2. 출입국 관리소로부터 당분간의 해방

어느 나라를 가던 이민국을 간다는 것은 물리적, 정신적인 스트레스다. 일본의 경우는 그나마 친절하고 빠른 편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단 갔다 하면 붐비는 곳에서 반나절은 죽치고 있어야 하니 곤욕스럽다. 이제 6년간은 갈 일이 없으니 당분간은 해방이다.


3. 미미한 공동체 의식의 형성

생각해 보니 이런 공동체 의식의 형성이 단지 설문지 작성으로만 표출되는 게 아니었다. 우선 일본 체육인들의 승전보에 내가 기쁘게 반응한다.  마쯔아먀(Hideki Matsuyama)의 일본 남자 골프 역사 최초의 메이저 우승, 나오미 오사카(Naomi Osaka)의 테니스 그랜드 슬램 달성 등 뉴스에서 접하는 이들의 소식에 기뻐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준법정신과 규칙을 잘 따르는 생활습관에 나 홀로 모난 돌이 되지 않으려 행동한다. 작은 신호라도 기다려 건너고 쓰레기 분리수거도 맨션의 규칙에 맞추어 따르며 친절한 서비스업 종사자분들께는 나도 최대한 호의를 표하려 노력한다. 

이런 변화가 6년 남짓 이곳에 살다 보니 몸에 배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영주권이라는 것이 생기고 나서 조금 더 익숙해진 습관인 것은 분명하다.




4.  정치에 관한 관심

뉴스를 볼 때면 말이 많아진다. 남의 나라 정치며 제도 얘기에 내가 왜 군시렁거리는지, 특히 요즈음 코로나 대응에 어쩔 줄 모르는 스가 정부와, 관료주의라는 온천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본 사회에 대해 투덜투덜 말이 많아졌다. 


5. 집과 차에의 소유욕

영주권이 없을 때에는 5년짜리 비자가 있었는데 만료 전 갱신이 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왠지 일본에는 5년만 살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후까지 생각하다 보니 비싼 월세 대신에 집을 마련하고, 궁둥이 붙이고  눌러앉을 것이니 차도 어차피 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된다. 물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분명 검토가 시작돼야 할 것들이다.


6. 커뮤니티에 관한 욕심

우리 부부는 모임이나 뭔가에 속해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소셜 능력이 없어 사회활동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조직에서는 누구보다 잘 어울리고 즐긴다. 하지만 타지 생활에 나이도 들어가니 둘만의 시간이 늘어나고 한국도 가본 지 한참이라 간혹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늙어갈 터라면  몇몇의 커뮤니티쯤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지금 커뮤니티가 없는 것은 아닌데,  미술 관련 작가들, 갤러리 사람들이나 마누라상의 회사 사람들과 가끔 만나고 어울리기는 하지만 일이 겹쳐 있다 보니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된다. 어릴 적 친구들처럼 편하지는 않아도 가끔 부담 없이 술 한잔할 수 있는 사람 욕심이 생기는 것도 일본에 살기로 마음먹고 나서 달라진 점인듯하다.



이렇게 영주권을 받은 후의 생활에 관하여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대부분이 생활 습관에 관련된 것들이다. 꼭 신분증에 새겨진 글자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한 곳에서 오래 살고 같은 곳에서의 미래를 계획하다 보면 다들 준비해야만 하는 것들을 우리 부부도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자치회 설문조사에서 시작된 잠깐의 대화와 몽상의 결과는 의외로 꽤 계몽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20년 후에 우리 부부가 어디서 흰머리 가득해 살아가고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지내기로 했다. 처음 받은 5년 비자는 만료된 셈이니 이제부터 도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고 생각하며 좀 더 의미 있게 살아 보기로... 


어디에 살고 있던 부디 멋쟁이 늙은이들이 되어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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