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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버팀글 Sep 22. 2022

아들 가진 딸바보

일종의 육아고민


 나는 10살 아들과 7살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다. 별반 해 준 것 없지만 감사하게도 건강하고 밝게 자라고 있는, 흔해빠진 말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이들이다. 그 귀함의 정도가 두 아이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리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요즘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그건 바로 내가 봐도 나는 명백한 '딸바보'라서다.


 딸아이의 애교가 절정에 달했다. 원래도 잘 웃고 장난기 많은 녀석이었는데, 일곱 살 즈음되니 애교를 부리는 데 있어 사용하는 어휘나 표현력이 더욱 현란하고 깊어졌다. 보고 있으면 혼이 쏙 빠질 지경. 어디서 이런 애가 튀어나왔나 신기할 정도다.


 가끔은 너무 과해서 엄마에게 오버하지 말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딸바보의 눈에는 그것이 문제로 인식될 리 없다. 딸도 그런 아빠 눈에 씐 콩깍지를 이미 눈치챈 지 오래라, 내가 있으면 더욱 강도 높은 애교를 끌어내서 엄마의 핀잔 같은 본인에게 불리한 상황을 타파하기도 한다.


 지난 주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데 오르막이 나오자 딸아이가 못 걷겠다며 내게 업혔다. 이미 그 전에도 덥고 힘들다 그래서 몇 번 업었더랬다. 그때마다 딸은 내 목을 꼭 끌어안은 채 귀에다 대고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과 자기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는지를  앙증맞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기온이 32도에 달하는 늦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나 역시 지칠 대로 지쳤지만,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아이를 업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오르막을 힘주어 오르며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이 세상 제일가는 딸바보가 되겠노라고.




2013년 3월 22일, 큰 애가 태어났다. 그 작고 여린 얼굴에서도 숨길 수 없는 잘생김이 듬뿍 묻은 아들이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그 모습만 바라봐도 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남자아이 치고 애교도 많은 데다 똑똑하고 말도 잘해서, 나와 아내를 포함한 주변 어른들에게도 쉴 새 없이 즐거움을 주는 아이였다.



 시간은 훌쩍 흘러 이제는 자기 할 일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는 어린이가 되었다. 엄마 아빠보다는 친구들과 게임하며 노는 게 좋은, 이제 곧 도래할 사춘기를 목전에 둔 초등학교 3학년생이다. 학교와 학원에서 내 준 숙제를 해야 하고, 엄마가 어린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책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세 살이 어린 여동생을 수시로 챙겨야 하는 오빠로 살아가는 중이다.


 둘 이상의 아이를 둔 부모들이 대부분 가진다는 첫 아이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나 역시 가지고 있다. 네가 첫째고, 오빠이니 아무래도 동생보다 더 희생해야 함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남자로서 아들이 점점 커 가는데 대한 두려움이 나의 최근 고민이기도 하다.


 며칠 전 딸아이가 태권도 학원을 갔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배가 고프다며 간식으로 사놓은 빵을 찾았다. 그런데 먼저 온 오빠가 다 먹은 것 같다며 울먹거리길래, 나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자기 방에서 휴대폰으로 게임 중인 아들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아들은 게임 중인 손가락을 바삐 놀리며 엄마가 다 먹어도 된다고 그랬는데 왜 나한테 뭐라 그러냐고 짜증을 냈다.


 나는 아들에게 당장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아들은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거실로 나와 내 앞에 섰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눈빛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무섭게 화를 내며 지금 하고 있는 너의 태도와 동생에 대한 배려 없음을 한참 동안  나무랐다. 그새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아들은 결국 내게 잘못했다는 한 마디를 억지로 뱉고서야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를 나무라는 와중에도 나는 아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두려워서 이러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잘잘못을 떠나 점점 커 가는 저 사내아이를 그냥 두면, 얼마 안 가 이 집안의 유일한 성인 남자로서의 나의 권위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우려가 이런 식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그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이제는 쉽지가 않다. 오히려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아빠가 미안해'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말을 쉽게 하면 결국엔 내가 지는 게 될까 봐 망설여진다.


 그날 저녁 아내와 아내의 직장 동료에게 아들과의 일을 털어놓고 나름의 용기를 얻었다. 잠들기 전 아들의 침대로 가서 손을 잡고 아빠가 미안하다고 말해줬다. 어색하다. 이제 정말 쉽지 않구나. 어느 순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아들과의 거리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행여나 날이 갈수록 동생만 더 예뻐하는 딸바보 아빠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걱정이 들었다.




 "얘들아, 아침이다. 일어나자."


 아침 7시 30분, 간단한 식탁을 차린 뒤 아이들을 깨웠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혼자 자는 이는 아들이다. 아들은 금세 일어나 주섬주섬 거실로 나와 밥을 먹기 시작하지만, 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이불속에서 버틴다. 내가 있으면 더 잠을 깨지 않는 딸에게 울화통이 터질 법도 하지만, 딸바보인 나는 싫지가 않다. 번쩍 들어 안아 식탁 의자에 앉히면 그대로 눕고, 다시 일으켜 앉히면 또 눕는다.


 그러는 사이 듬직한 아들은 밥그릇을 비우고 학교  준비를 완료한다. 학교에서 마실 물을 물병에 받고 마스크를  , 가방을 들쳐메며 엄마 아빠에게 다녀오겠노라 인사를 한다.   컸다. 결국 나의 숙제다. 아들은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나는 점점 늙고 약해질 테니.  나은 아빠가 되고자 한다면 서둘러야 한다.


 문을 열고 나서려는 아들을 불러 세우고는 꼭 껴안았다. 자기도 뭔가 느끼는 마냥 나를 꼭 끌어안는다. 같은 남자로서 경쟁의식도 생길 테지만, 둘 만의 공감대도 있을 테다. 비록 최강 딸바보일지라도, 아들의 아빠로서도 멋있게 남고 싶다. 아들과 멋있게 싸우고, 멋지게 연대하며, 함께 이 험한 세상 헤쳐나가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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