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육아고민
나는 10살 아들과 7살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다. 별반 해 준 것 없지만 감사하게도 건강하고 밝게 자라고 있는, 흔해빠진 말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이들이다. 그 귀함의 정도가 두 아이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리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 요즘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그건 바로 내가 봐도 나는 명백한 '딸바보'라서다.
딸아이의 애교가 절정에 달했다. 원래도 잘 웃고 장난기 많은 녀석이었는데, 일곱 살 즈음되니 애교를 부리는 데 있어 사용하는 어휘나 표현력이 더욱 현란하고 깊어졌다. 보고 있으면 혼이 쏙 빠질 지경. 어디서 이런 애가 튀어나왔나 신기할 정도다.
가끔은 너무 과해서 엄마에게 오버하지 말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딸바보의 눈에는 그것이 문제로 인식될 리 없다. 딸도 그런 아빠 눈에 씐 콩깍지를 이미 눈치챈 지 오래라, 내가 있으면 더욱 강도 높은 애교를 끌어내서 엄마의 핀잔 같은 본인에게 불리한 상황을 타파하기도 한다.
지난 주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데 오르막이 나오자 딸아이가 못 걷겠다며 내게 업혔다. 이미 그 전에도 덥고 힘들다 그래서 몇 번 업었더랬다. 그때마다 딸은 내 목을 꼭 끌어안은 채 귀에다 대고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과 자기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는지를 앙증맞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기온이 32도에 달하는 늦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나 역시 지칠 대로 지쳤지만,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아이를 업었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오르막을 힘주어 오르며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이 세상 제일가는 딸바보가 되겠노라고.
2013년 3월 22일, 큰 애가 태어났다. 그 작고 여린 얼굴에서도 숨길 수 없는 잘생김이 듬뿍 묻은 아들이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그 모습만 바라봐도 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남자아이 치고 애교도 많은 데다 똑똑하고 말도 잘해서, 나와 아내를 포함한 주변 어른들에게도 쉴 새 없이 즐거움을 주는 아이였다.
시간은 훌쩍 흘러 이제는 자기 할 일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는 어린이가 되었다. 엄마 아빠보다는 친구들과 게임하며 노는 게 좋은, 이제 곧 도래할 사춘기를 목전에 둔 초등학교 3학년생이다. 학교와 학원에서 내 준 숙제를 해야 하고, 엄마가 어린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책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세 살이 어린 여동생을 수시로 챙겨야 하는 오빠로 살아가는 중이다.
둘 이상의 아이를 둔 부모들이 대부분 가진다는 첫 아이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나 역시 가지고 있다. 네가 첫째고, 오빠이니 아무래도 동생보다 더 희생해야 함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남자로서 아들이 점점 커 가는데 대한 두려움이 나의 최근 고민이기도 하다.
며칠 전 딸아이가 태권도 학원을 갔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배가 고프다며 간식으로 사놓은 빵을 찾았다. 그런데 먼저 온 오빠가 다 먹은 것 같다며 울먹거리길래, 나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자기 방에서 휴대폰으로 게임 중인 아들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아들은 게임 중인 손가락을 바삐 놀리며 엄마가 다 먹어도 된다고 그랬는데 왜 나한테 뭐라 그러냐고 짜증을 냈다.
나는 아들에게 당장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아들은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거실로 나와 내 앞에 섰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눈빛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무섭게 화를 내며 지금 하고 있는 너의 태도와 동생에 대한 배려 없음을 한참 동안 나무랐다. 그새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아들은 결국 내게 잘못했다는 한 마디를 억지로 뱉고서야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를 나무라는 와중에도 나는 아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두려워서 이러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잘잘못을 떠나 점점 커 가는 저 사내아이를 그냥 두면, 얼마 안 가 이 집안의 유일한 성인 남자로서의 나의 권위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우려가 이런 식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그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이제는 쉽지가 않다. 오히려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아빠가 미안해'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말을 쉽게 하면 결국엔 내가 지는 게 될까 봐 망설여진다.
그날 저녁 아내와 아내의 직장 동료에게 아들과의 일을 털어놓고 나름의 용기를 얻었다. 잠들기 전 아들의 침대로 가서 손을 잡고 아빠가 미안하다고 말해줬다. 어색하다. 이제 정말 쉽지 않구나. 어느 순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아들과의 거리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행여나 날이 갈수록 동생만 더 예뻐하는 딸바보 아빠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걱정이 들었다.
"얘들아, 아침이다. 일어나자."
아침 7시 30분, 간단한 식탁을 차린 뒤 아이들을 깨웠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혼자 자는 이는 아들이다. 아들은 금세 일어나 주섬주섬 거실로 나와 밥을 먹기 시작하지만, 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이불속에서 버틴다. 내가 있으면 더 잠을 깨지 않는 딸에게 울화통이 터질 법도 하지만, 딸바보인 나는 싫지가 않다. 번쩍 들어 안아 식탁 의자에 앉히면 그대로 눕고, 다시 일으켜 앉히면 또 눕는다.
그러는 사이 듬직한 아들은 밥그릇을 비우고 학교 갈 준비를 완료한다. 학교에서 마실 물을 물병에 받고 마스크를 쓴 뒤, 가방을 들쳐메며 엄마 아빠에게 다녀오겠노라 인사를 한다. 참 잘 컸다. 결국 나의 숙제다. 아들은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나는 점점 늙고 약해질 테니. 더 나은 아빠가 되고자 한다면 서둘러야 한다.
문을 열고 나서려는 아들을 불러 세우고는 꼭 껴안았다. 자기도 뭔가 느끼는 마냥 나를 꼭 끌어안는다. 같은 남자로서 경쟁의식도 생길 테지만, 둘 만의 공감대도 있을 테다. 비록 최강 딸바보일지라도, 아들의 아빠로서도 멋있게 남고 싶다. 아들과 멋있게 싸우고, 멋지게 연대하며, 함께 이 험한 세상 헤쳐나가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