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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버팀글 Sep 19. 2022

내가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야

우리 가족 고생 고생 걷고 걸은 이야기


 새하얀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열기를 뿜어대는 한낮의 시골길 위에서, 나는 땀으로 절여진 등 위에 또다시 둘째 아이를 업었다. 기온은 32도.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 아래서 나와 내 가족은 두 시간을 넘게 걷고 있었다. 오르막이 나오자 아직 일곱 살 밖에 안된 딸은 힘들다며 울음을 터뜨리고, 걷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나는 아이를 업고 다시 걸었다. 골반이 내려앉으며 허벅지를 누르는 느낌이 심상치 않다. 이 여정이 끝나더라도 한동안 고생하겠구나. 고통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지만 애써 누르며 다짐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노라고.




 토요일 아침, 평소에는 늦잠 잔다고 꼼짝도 않을 시간, 우리 네 가족은 나갈 채비를 했다. 지역에서 활동 중인 환경 단체에서 매달 주최하는 지리산 주변 걷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잠이 덜 깬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서둘러 집을 나서 차를 몰았다..


 아내는 전부터 이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다. 몇 번의 참가 시도 실패 후 이번에 성공하자 기뻐하며 나와 아이들에게 일정을 알려왔다. 숲 선생님과 함께 걸으며 설명도 듣고, 주변 경치도 워낙 좋기 때문에 아이들도 분명히 좋아할 거라는 그녀의 기대에, 나도 나름 화답하며 주말 일정을 기다렸다.


 웬만한 아빠들은 다 한다는 등산이나 각종 운동 따위를 일절 안 하는 탓에, 아이들에게 관련한 경험들을 많이 못해 준다는 일종의 죄책감이 있던 터였다. 그래서 이번 일정에 대한 기대도 나 역시 컸다. 게다가 환경을 생각하는데 의의를 둔 걷기인지라 여러모로 좋을 듯했다. 아이들과 자연 속을 걸으며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공부도 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자주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봐야겠다고 다짐까지 했더랬다.


 그렇게 집결지에 도착해 참가 인원들이 함께 타고 이동할 관광버스에 올라탄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감지했다. 아이들이 없다. 버스 안을 채우고 앉은 이들은 부부이거나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참가한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서로들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마도 수차례 걷기에 참여하며 서로 안면이나 친분이 생긴 듯해 보였다. 아이라고는 우리 애들 말고  명이  있었다. 인솔하시는 선생님은 이번 걸음에 아이들도 함께 한다며, 코스가 초급자 수준이니 걱정할  없다며 우리를 포함한 모두를 안심시켰다.


 미심쩍었지만 이미 버스는 출발했고 얼마 가지 않아 출발지에 도착했다. 모여 간단한 참여 인원 소개와 코스 설명을 듣는 중에 큰 아이가 모기에 물렸다며 짜증을 부리다 못해 다리에 붙은 벌레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큰 애는 이곳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창 친구들과 놀고 싶은 열 살 초등학생은 오늘 이 일정 덕분에 친한 형아네 집 초대에 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의 짜증이 터졌고, 나와 아내의 심기도 불편해졌다.


 경호강을 끼고 걷는 코스의 출발은 시작부터 감탄의 연속이었다. 새파란 하늘과 강물이 산과 나무의 초록과 어우러진 풍경에 할 말을 잃는다. 다들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가운데, 아내는 큰애의 의욕을 돋우기 위한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게임 아이템과 내일 형아를 우리 집으로 초대한다는 통 큰 엄마의 제안에, 아이는 그제야 뾰로통했던 입술을 집어넣고 보폯을 넓혀 걷기 시작했다.


새롭게 복원된 환아정. 이 곳에서 엄마의 통 큰 제안을 아들이 수용하게 되며 우리 가족은 평화를 되찾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강을 끼고 걷던 나무 그늘 가득한 데크 길은 사라지고, 차도와 촌길을 걸으며 맞게 되는 작렬하는 태양빛에 우리는 금세 지쳐갔다. 이 걸음에 이미 익숙한 다른 어른 일행들은 점차 우리 가족과 멀어져만 갔다. 급격한 더위에 아이들은 갈증을 호소하며 힘들어했고, 급기야 내가 둘째를 업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든 좋은 마음으로 끝까지 완주해 보리라는 다짐은 점차 옅어져만 갔다. 이건 내가 생각하던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일행과 떨어져 선생님의 주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들을 수 없이 난데없는 극기 훈련을 치르게 됐다. 나보다도 아내의 전전긍긍은 더했다. 자기가 잡은 일정이 이렇게나 힘든 그림이 될 줄은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원래 체력이 약한 그녀도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자기 때문에 가족이 고생한다는 미안함 탓에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었다고 나중에 이야기해 주었다.


뙤약볕 아래를 걷고 또 걸어야만 했다.

 

 두 시간을 넘게 걸어서야 우리 가족은 점심을 먹기 위해 다리 밑 그늘에 자리 잡은 일행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선생님도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을 깨닫고서는 걱정과 동시에 우리를 독려했다. 햇볕에 그을려 벌겋게 익은 얼굴로 두 아이는 밥을 찾았다. 나는 선생님에게 남은 코스가 어떤지를 물었고 선생님은 지금까지 온 길 보다 훨씬 편하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주최 측에서 준 주먹밥과 가져온 간식을 먹고 나니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힘이 난다며 한층 밝아졌다.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해 보자며 기운을 내 본다. 다른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기특하다며 사탕이나 양갱 같은 주전부리들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신다. 하지만 식사 후 출발하자마자 오늘 코스의 유일한 난관이라 예고했던 '바람재'라는 오르막과 직면했고, 결국 나는 다시 작은 애를 등에 업어야 했다. 여기만 지나면 된다, 하지만 나는 다시 여기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결국 고개를 넘자 선생님 말대로 내리막에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갑자기 몰려온 구름에 날씨도 흐려지자 아이들은 그제야 기운을 차리며 걸음을 즐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꽃과 나무에 눈길을 주고, 나비와 곤충들을 관찰했다. 대화가 많아지고 웃음이 늘어났다. 이렇게 끝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 순간 우리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어느 순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걷던 길이 자연스럽게 산길로 이어지며 우리는 미처 듣지 못했던 산행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분명 편안한 내리막을 걷게 될 거라 하셨다.


 산길을 오르며 나와 아내는 속았다는 생각에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왜 솔직하게 말씀을 안 해 주신 거지? 우리가 그만두고 가 버릴까 봐 그러신 건가?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일행과 완전히 뒤처져 초행인 산길에 우리 가족만 걷게 되자 아내도 애써 누르고 있던 화를 숨기지 못하고 말았다. 애초부터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며, 선생님에게 속았다는 서운함을 쏟아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은 신이 났다. 큰 산이 아닌지라 가드 하나 없는 좁디좁은 길을 아이들은 잘도 오르내렸다. 큰 애와 작은 애는 경쟁도 하고 서로 도와가며 부모인 우리를 앞서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리 부부의 마음도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너무 기특하고 고마웠다. 진짜 힘들긴 한데, 진짜 기억에는 남겠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덩달아 산행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조만간 꼭 등산을 하자는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그렇게 산을 넘었다.


 하지만 산을 내려와서도 다시 한참을 걸어야 했고, 미처 산행을 제대로 주지하지 못한 선생님은 아이들이 더 걷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택시를 불러 우리 가족을 도착지로 먼저 보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략 12km, 나머지 일행들은 약 16km를 걷는 것으로 그날의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선생님은 미안함을 내비침과 동시에 다음에는 아이들 걸음에 맞추는 코스를 짜겠으니 꼭 함께 하자는 기대 어린 당부를 전하셨다.


 하루가 지나고 나니 온 삭신이 다 쑤셔온다. 걸음을 제대로 걷기가 힘든 게 며칠 고생할 듯싶다. 나와 아내는 일단 다음 달 걸음 일정에는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힘든 기억이 좀 잊혀야 가능하지 않을까? 가을 단풍 물들 때 너무 좋다는 선생님의 말씀도, 한 걸음걸음마다 두 다리와 골반에 느껴지는 이 통증을 이기기엔 역부족이다.


 이번 걸음을 최한 환경 단체에 진짜로 속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 오랜 시간 열심히 활동해  단체이고, 아내는  선생님과 나름의 친분도 있으며, 게다가  단체의 후원회원이다. 우리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이외에 다른  없음을 나도 아내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번  경험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다음 참가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을 통해 얻은 점도 있다. 앞서 말한 오래 남을만한 기억, 그리고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 그렇게 걷고도 산을 타고 내렸으며,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쌩쌩하다는 것. 이 깨달음은 앞으로 우리 가족이 함께 보내게 될 시간에, 그간 잘 없었던 활동적인 과정들을 추가하는 원동력이 될 듯싶다. 이 정도 얻었으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뭉친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물러본다. 쉬 풀리질 않는다. 아프다 아파.


사진도 남았다. 곳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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