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여름은 공장 노동자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계절이다. '땀의 가치'라는 말이 있다.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같이 하는 문구일 텐데, 이런 폭염 아래 쇠공장에서 흘려야 하는 땀에는 그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고픈 마음이 사라진다. 어떻게든 안 흘리고 싶다. 정말 더는 덥고 싶지 않다. 눈앞에서 뜨거운 바람 내뿜으며 돌아가는 저 공업용 선풍기도 곧 열이 받아 퍼져 버릴 것만 같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여름의 시작.
6월의 시작과 함께 지난달 격주로 일하고 쉬었던 내 일과는 휴무 없이 정상 출근으로 변경됐다. 내가 생산하는 제품이 코로나 위기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작업을 해서 내보내야 하기 때문. 남들이 일 못해서 돈 못 벌 때,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게니 분명 운이 좋은 거지만, 운도 없게 '하필 이 더울 때'란 말이 절로 나오는 요즘이다. 아무튼 공장의 한여름 무더위는 쉽게 넘기기 힘든 역경. 동료들과 모이기만 하면 서로 던지는 화두 역시 '덥다'. 그러다 보면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이런 설문조사가 진행되곤 한다.
Q. 당신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 둘 중 어떤 환경에서 일하기가 힘든가요?
동료들의 대답은 압도적으로 여름이 많았는데, 그 이유로는
1. 안 그래도 줄줄 흐르는 땀이 공장 안에 떠도는 쇳가루 섞인 유증기와 만나 온몸에 쩍쩍 덜러붙는 그 불쾌함이 싫어요.
2. 겨울은 점점 짧아지고 따뜻해지는 느낌인데, 여름은 정 반대인 것 같습니다. 갈수록 더 더워지고 더 길어지는 것 같아요.
3. 추우면 껴입으면 되지만, 덥다고 마냥 벗을 수는 없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달궈지는 공장 안팎. 아침에 남아있던 약간의 선선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후덥 한 공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펼치는 두 시간의 노동은 찐한 목마름을 불러온다. 드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달달하고 상큼한 사과맛 음료수가 마시고파 쏜살같이 달려간 자판기 앞에서 그만 망연자실하고 만다. 캔 음료 버튼에 줄지어 떠 있는 빨간색 X 표시.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갈증을 못 이기고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제 마실 수 있는 건 종이컵에 담겨 나오는 뜨거운 커피와 율무차뿐. 울고 싶은 심정을 겨우 억누르고 식당 정수기로 가서 찬물을 몇 잔 들이켠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설탕물로 채워야 했을 당분에 대한 미련 탓인지 괜스레 입맛을 다신다.
생각해보면 유독 여름에 살이 찐다. 땀 흘리는 양에 비하면 유독. 하지만 그만큼 마시는 음료수 캔 숫자를 계산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갈증에 메마른 목구멍을 적시려 이온음료를 마시고, 점심 식사 후 밀려드는 졸음을 쫓으려고 캔커피를 들이켠다. 당이 떨어진다며 사과맛 주스 캔 뚜껑을 따고, 살짝살짝 드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콜라를 찾는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잘 알지만, 이미 중독된 이 자판기 음료 라인업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헛배가 불러오며 더해지는 뱃살의 두둑함은 덤. 이러니 밥을 굶어도 살 안 찌기는 어렵다.
또 그렇다고 밥을 굶을 수 있나?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점심시간, 늘 먹는 공장 식당 밥을 대신할 여름의 별미를 찾아 삼삼오오 모여 차를 타고 종종 밖으로 나간다. 인근 식당 중 몇 군데 후보군이 있다. 첫 번째로 막국수. 세숫대야 같은 커다란 쇳그릇에, 쫄깃한 면발 가득 담고 육전 고명에 얼음 둥둥 띄운 물막국수 한 젓가락에 국물 한 모금 후루룩 마시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온다. 미각을 제대로 깨우고 싶으면 비빔막국수도 좋고.
그리고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횟집. 새콤한 초장에 버무려진 고소한 생선회의 뽀독뽀독한 식감이 일품인 시원한 물회 한 그릇 하면, 덕분에 잘 먹었다며 한여름 무더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지경. 그 외에도 보양식 하면 빠질 수 없는 삼계탕, 별미 중에 별미인 콩국수까지. 음식으로 계절을 이겨보려는 노력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바로 여름이 가진 미덕 아니겠는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종일 후끈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가면 이번엔 맥주 생각으로 간절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밑에서 약간 도수가 높은 캔맥주를 얼음이 담긴 잔에 따라 마시면, 그제야 몸에 쌓인 열기가 빠져나가는 느낌. 올여름은 엄청 덥다더라 어떡하냐 주절거리니, 아내가 내일 아침 출근할 때 시원한 미숫가루를 보냉병에 담아 손에 쥐어주겠단다.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 우유에다 미숫가루를 붓고 꿀 한 숟갈 얹어 만든 달달하고 고소한 그 맛!
그래, 어쩌겠나. 여름은 더워야 제 맛이지. 아무리 더워도 나는 일 할 거야. 그래야 미숫가루도 마시고 자판기 음료에 맥주도 마시지. 그래야 여름 별미도 별미인 게지. 좀 힘들어도 식도를 타고 넘어올 시원하고 맛난 것들 생각하며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해. 그러다 보면 올여름도 어느새 지나가겠지. 그때쯤엔 좋은 소식도 들리고 다들 고생했다, 잘 버텨냈다며 서로에게 축하와 위로를 건넬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