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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버팀글 Sep 03. 2020

중요한 건 이야기가 아니야

영화 '테넷'

 일단 그래, 난해하다. 글의 제목과 약간 대치되긴 하나 어쨌든 이 말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꽤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타임 패러독스', '인버전', '엔트로피' 같은 과학적 개념들이 뒤섞인 영화 속 세계관을 바탕으로 스펙터클한 액션이 휘몰아친다. 대사는 불친절하고 컷은 빠르게 나뉜다. 뿌려진 떡밥을 회수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으나, 생소한 영화 속 시공간의 개념 때문에 액션 자체에 대한 어리둥절함이 자꾸 동반된다. 관객들이 이 부분을 좀 걷어내고 볼 수 있다면, 아니 영화 속 대사처럼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냥 느끼기만 한다면, 뭔가 대단한 영화 한 편 보고 나왔단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듯하다.


 어쨌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볼 만하다. 그의 영화에는 늘 신박하고 때깔 나는 '장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셉션'의 도시가 휘어지며 위아래로 맞닿는 씬이라던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오프닝인 비행기 하이재킹 씬. '인터스텔라'의 블랙홀, '덩케르크'의 엔진이 꺼진 채 활강하는 비행기 씬 같은 것들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공간을 꼬아대는 그의 복잡한 이야기 구조에 의미들을 부여하지만, 놀란 감독의 방점은 극장의 큰 화면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신박한 장면 연출에 찍혀있다고 본다. 그래서 필름 촬영이나 아이맥스 카메라에 집착하는 것일 테고.


출처 movie.daum.net

 

 다만 그가 기깔나는 장면만큼 천착하는 것이 서사 속 시공간을 자기 마음대로 재배치하는 것인데, 아마도 이것 자체가 오직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시각적 쾌감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 내가 감독이랑 친분이 없으니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내 예상은 이런 게다.


 자, 나 놀란은 이번에 '시간 여행'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 주인공이 현재에서 무언가 어떤 방법으로 과거로 갔어. 그리고 쭉 따라가. 사건이 생기고 잘 해결했고, 다시 현재로 돌아왔지. 끝. 이게 보통의 이야기 구조일 텐데, 너무 평범하잖아! 그건 나답지 않잖아! 지금부터 꼬우기 들어간다.


 인셉션 땐 꿈속에 꿈속에 꿈마다 각기 흐르는 시간을 달리해서 쫄깃함을 줬고, 인터스텔라 땐 우주 곳곳마다 시간이 달리 흘러 나중에 딸이랑 블랙홀에서 막 감동감동 그런 감동이 없었지. 덩케르크는 인물들의 각기 다른 처지에 따라 일주일, 하루, 한 시간씩 다르게 시간을 부여해 마지막에 극적인 어울림을 만들어냈어. 자, 이번엔 뭘 어떻게 해 보지?


 아, 그래! 영화 자체가 어쩌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아니야? 뭔 소리냐고? 잘 들어봐. 우리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카메라로 움직이는 인물들과 변화하는 배경을 촬영해. 앞으로 흐르는 시간을 찍는 거라고. 근데 이걸 뒤로 돌릴 수 있잖아? 리와인드, 되감기 말이야. 그럼 앞으로 흐르는 시간이 화면 속에서 뒤로 돌아가잖아. 그럼 이 자체가 시간여행 아니야? 이거 신박한데? 역행하는 시간 속으로 주인공이 이렇게 저렇게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빠져나오는 거야. 잠입, 스파이물도 괜찮겠어. 역시 난 천재야! 책 가져와봐, 이거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 좀 찾아보란 말이야!


 뭐 웃자고 말하자면 이런 거 아닐까 싶다. 궁극적으로 놀란은 영화 속 하나의 장면 속에 시간의 순행과 역행을 동시에 담아내고자 했고, 이번 영화 '테넷'이 그 결과물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많은 과학 이론이 인물들의 입을 통해 간단히 설명되고 지나간다. 이 개념들을 미리 알고 가면 좋겠지만 안 그래도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다. 깊게 파고들면 숨겨진 의도나 앞뒤를 디테일하게 맞춰보는 재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감탄하며 볼 수밖에 없는 장면들로 넘쳐나는 액션 스릴러기 때문.


 알고 보면 뭉개고 지나가는 이야기 속 논리적 허점도 많다고 하더라. 아마 모르긴 몰라도 놀란도 어느 정도 맞추다가 '에잇, 그냥 넘어가' 했을 것이다. 그에게 이야기보다 중요한 건, 관객들이 스크린으로 영화를 통해 눈으로 보게 될 한 장면 장면의 새로움과 놀라움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많이 어려운 시국이지만) 극장을 찾아 몇 번 더 보고 싶단 생각과 더불어 감독의 다음 작품 역시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 음악이 예술이다. 음악감독이 '한스 짐머'에서 이번에 바뀌었다던데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다.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트래비스 스캇'의 'The Plan'도 멋으로 도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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