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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버팀글 Sep 22. 2020

이해하지 말고 느끼려면, 들어보라

영화 '테넷' OST

 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있다. 음악은 좋은데 영화가 별로인 경우는 있겠으나, 좋은 영화에는 반드시 좋은 음악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기분 좋게 보고 나올 때면 배경음악을 흥얼거리다 근처에 레코드 점으로 들어가 그 영화의 OST 앨범이 있는지 확인하던 때가 있었더랬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가 앨범의 재킷인 CD를 집어 들면 어찌나 황홀하던지. 음악을 들으며 방금 보고 나온 영화를 머릿속으로 다시 보며 감상에 빠진다. 그렇게 영화가 주는 감동과 재미는 배가 되고, 때로는 내 안에서 장면과 서사가 무한히 확장되며 뻗어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 '테넷'의 OST에 꽤나 몰입 중이다. 영화의 불편한 내용 전개와 어려운 밑그림 탓에 관련한 여러 해석들이 넘쳐난다. 이런 궁금점들을 찾아보는 것도 분명 영화 감상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부분이겠으나, 못지않게 OST를 따로 들으며 영화 속 인물과 사건의 감정적 흐름과 변화들을 다시 느껴보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만하겠다. 복잡한 이야기 구조만 좇다 보니 놓치게 되는 이 영화의 좋은 점들을 귀로 '들을 수' 있다.


'테넷' 오프닝 씬 중

 

 영화의 시작, 거대한 오페라하우스 안 객석은 관객으로 가득하고, 무대 위에서는 연주자들이 악기들을 조율한다. 서로 맞지 않는 현악기들의 소리가 가득히 공간을 채우다 쿵. 시점이 바뀐 카메라는 테러집단에 섞여 미션을 완료하려는 주인공의 긴박한 움직임을 쫒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휘몰아치는 스펙터클을 끌고 감에 있어 OST의 첫 곡 'RAINY NIGHT IN TALLINN'의 역할은 단연 돋보인다. 기괴한 전자음과 둔탁하지만 속도감 있는 타악기의 배합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일품. 미리 완성된 음악에 일방적으로 맞춰 영상을 편집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오프닝 신의 몰입감을 음악이 책임지고 있다.


 놀란의 전작들 또한 스케일이 큰 영화들이라 이전의 OST에서도 '한스 짐머'라는 거장을 통해 웅장하고 박력 있는 곡들로 영화를 가득 채워왔다. 이번에 그를 대신해 음악감독을 맡은 '루드비히 고란손' 역시 기존 짐머의 음악이 갖는 큰 스케일을 유지하되, 더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놀란의 작품들이 보통 인물의 감정 서사에 공을 크게 들이는 편이 아닌지라, 한스 짐머의 음악 역시도 평소 다른 작품들에 비해 놀란과 함께하면 유려한 멜로디 라인이 사라지고 다소 건조하단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더해서 고란손은 힙합 베이스의 신시사이저와 싸이키델릭한 일렉기타로 빠른 템포의 강렬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며, 놀란의 첫 첩보 액션물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감각을 덧입힌다. 'FREEPORT', 'TRUCKS IN PLACE', 'RETRIEVING THE CASE', 'POTERITY' 같은 곡들이 대표적이다.


루드비히 고란손


 반면에 'WINDMILLS' 같은 곡에서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주인공 '주도자'가 홀로 풍력발전기 안에서 몸을 만드는, 익숙해 보이지만 쓸쓸함이 묻어나는 동작에서 인물의 오랜 고행을 짐작할 수 있는 신을 무겁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감정선을 지닌 인물인 '캣'의 테마곡 'BETRAYAL'은 아들을 위해 남편의 폭압을 견디지만 그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인물의 정서를 서정적이지만 불안한 멜로디와 연주로 그려낸다. 영화의 엔딩 테마인 'THE PROTAGONIST'는 미션을 완수한 주인공이 이 모든 일들의 비밀을 비로소 깨닫게 되며 밀려드는 비장함과,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일어나게 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곡이다.


 좋은 음향장비를 갖추고 듣고 싶단 욕구가 강하게 밀려드는 앨범이다. 소위 음악을 만드는 작업은 건축의 과정과 유사하다는 말들을 한다. 기초가 되는 리듬 위에 베이스가 될 만한 소리부터 하나하나씩 쌓는 과정이 건물을 짓는 것과 비슷해서일 것이다. 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연출이 존재한다. 드럼이 몇 마디를 반복하다 기타가 들어오고, 이 타이밍에서는 소리를 싹 비웠다가 다시 몰아치고 하는 식의 곡의 기승전결 같은 것들을 연주의 채움과 비움으로 표현한다.


 OST 같은 경우 그런 연출, 즉 음악을 건축하는 데 있어서의 설계를 영화의 서사와 장면에 맞춰 진행하게 된다. 그런 면에 있어 영화의 OST를 감상하는 것은 마치 도면을 보며 동시에 건물을 짓는 듯한 재미라 말할 수 있겠다. '테넷'을 본 사람들에게 이 잘 만들어진 음악들은 아마도 새로운 즐길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과학 이론과 복잡한 서사를 좇는 것 말고도, 음악과 사운드를 따라 더욱 풍성해져 오는 영화 속 인물과 사건의 층위 또한 놓치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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