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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버팀글 Nov 21. 2020

이삿날 식겁한 이야기

이보게 젊은이, 자네 뜻대로 되는 세상 아닐세



선생님, 부동산인데요.
새로 들어오시는 세입자 분이 집주인에게
방금 전세금을 입금 하셨다거든요.
어......
그런데 집주인 분이 전화를 안 받으셔요.
선생님께도 입금을 해 드려야 되는데.....
연락을 한 번 취해보시겠어요?



 이사 당일 아침, 면사무소에 들러 서둘러 전입 신고를 마쳤다. 기존 세입자인 내가 빠져나가 줘야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의 전세자금 대출이 진행되어 대출금이 집주인에게 입금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 돈을 내가 받아야 하니 내 어찌 서두르지 않고 배기겠나? 면사무소 업무 시작 30분 전부터 가서 기다렸다가 급한 것부터 처리하고, 이사 가면서 버릴 가구들에 붙일 폐기물 스티커까지 여유 있게 구매하고 나오니 오전 9시 15분.


 오케이! 됐어! 새로 들어갈 집에 잔금 치르기로 한 10시까지 아직 한참이군. 됐어, 이제부터 축제를 즐겨보자고! 그렇게 룰루랄라 면사무소를 나오는데 부동산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이 한껏 들뜬 기분을 단번에 내려 앉혔다. 밀려오는 극도의 스트레스. 불과 이틀 전에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하여 오전 10시에 잔금을 치르게 됐다, 그래서 새로 들어오는 분들 전세자금 대출도 은행 통해 아침 일찍 진행시켜 내 보증금 확보에도 어려움 없게 할 테니, 시간 맞춰 꼭 돈을 좀 보내달라 신신당부를 했더랬다. 그런데 당일 아침에 송금은커녕, 아예 연락이 두절돼다니!


 그리고 떠오르는 2년 전, 지금 떠나는 집으로 이사 왔던 그 날의 기억.






 보일러가 이상하다. 일단 컨트롤러 상태가 좋지 않다. 버튼도 잘 안 먹고 정보 표시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보일러는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사 온 첫날, 기분 좋게 정리를 마치고 집을 데우려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살펴보니 20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가 지어질 때부터 이 보일러도 함께 한 듯. 날이 추워 급히 수리 기사님을 부르고 집주인에게도 전화로 상황 설명을 했다. 컨트롤러는 교체했고, 보일러는 안 되는 건 아닌데 교체하는 게 좋겠다고 집주인과 전화 통화를 나누던 기사님이 내게 전화기를 넘기셨다.


 "그냥 쓰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되는 건 아니니까 굳이 바꿀 것까지 있겠어요?"


 황당했다. 내 마음대로 작동이 안 되는 보일러를 어떻게 쓰냐라고 항변하니 그럼 컨트롤러만 교체하자며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한다. 결제 부분은 따로 말이 없어 일단 내가 기사님께 수리비 15만 원을 드리고 영수증을 사진으로 찍어 내 계좌번호와 함께 집주인에게 문자로 보내드렸다. 아,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입금이 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더니 안 받는다. 바쁘신가 싶어 다음 날, 또 안 받으셔서 그다음 날, 그렇게 한 달이 넘도록 집주인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15만 원도 15만 원이지만 내 전세 보증금을 갖고 계신 분이 연락이 안 된다는 게 이게 말이 되나? 분하고 걱정되는 상태로 한 달 동안 나는 아무 대답 없는 전화와 문자를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례적으로 건 전화를 딸깍하고 받는 집주인의 여보세요. 순간 당황스러워 제대로 화도 못 내고 돈 이야기부터 꺼낸 내게 그가 하는 말.


 "어차피 그 집에서 살면서 사용하실 거니까, 비용을 반반씩 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반반하면 7만 5천 원씩. 아마 그때 나는 그 상황 자체에 지쳐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빨리 정리하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하자고 하고 전화를 끊으니 1분도 채 안 되어


 '8만 원 송금! 늦어서 미안합니다'


라고 문자가 온다. 그렇구나, 늦은 게 미안해서 이렇게 빨리, 그것도 5천 원을 더 보내주셨구나. 동시에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 2년 계약이 끝나면 이 집을 나간다. 둘째, 다음 집은 세입자가 아닌 세대주로 들어가리라.






이삿날 아침 절규하는 내 모습을, '뭉크'라는 옛날 서양 화가가 어찌 알고 그린 그림이다


 그 날의 결심을 실행하게 된 바로 오늘, 나는 어쩌면 예상 가능한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는 전화. 시간은 어느덧 10시가 되었고, 나는 미쳐버릴 것 같은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잔금을 차르기 위해 약속된 장소로 문을 열고 들어가 이사 갈 집주인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최대한 난감한 표정으로 현 상황을 설명했다. 그 역시 적잖게 당황하며 내게 뭔가를 이야기하려던 그 순간 울리는 전화벨. 집주인이었다. 화를 내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바로 보증금 입금을 재촉했다. 그러자 인자하고 온화한 톤으로 그가 하는 말.


 "당장은 좀 힘들고,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불같이 화를 내며 내 입으로 뱉을 수 있는 모든 욕을 퍼붓고 싶었다. 그의 연세 지긋함도 전혀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게 돈을 받아가야 할 사람이 내 앞에 앉아있고, 그 돈은 수화기 너머 여유를 부리고 있는 그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공손하게, 하지만 다급함을 잔뜩 묻혀서 최대한 빠른 송금을 부탁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입금이 되었다는 휴대폰 알림이 울렸고, 그제야 나는 기다림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역시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사 가기 전 날 밤 썼던 글 중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 일도 생길지 몰라'라는 문장이, 마치 생명이라도 부여받은 듯 다음 날 내 앞에 떡하니 나타난 기분이었다. 말도 함부로 말아야지. 답답한 정도를 넘어 수명이 닳았을 게 분명한, 정말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액땜했다 정도로 생각해야지 어쩌겠나? 아무튼 잘 마무리됐고, 나는 이사를 왔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잘 살아보라는 의미로, 집주인 분이 막판에 작은 시련 하나 던져준 거라 여기겠다. 덕분에 멘탈 강화 훈련 제대로 했다. 그쪽도 잘 먹고 잘 사시라.


 오케이! 됐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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