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
새아빠와 함께 지냈던 시절 아찔한 순간이 많았다. 능력이 부족했던 아빠와 살아가는 것은 버거웠고 비참했다. 함께 할 방조차 구하지 못한 채 고물상 사장님의 편의로 방 한 칸과 창고로 썼던 컨테이너가 있는 곳에서 자매는 생활해야 했다. 사무실로 사용한 집이기에 화장실은 당연히 밖에 있었다. 밤마다 무서워 동생과 함께 화장실을 가야만 했던 그곳이 새아빠와 두 번째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컨테이너 창고는 잠금장치가 허술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러 번 확인을 했던 그 시절.
어느 집이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겠지만 컨테이너 창고는 그 이상으로 더위와 추위를 이겨야만 했다. 그 정도 힘듬은 나에게는 이겨 낼 수 있었던 환경이기에 불만이 없었다. 아니다. 불만이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 억눌리고 살았는지도. 이마저 불만을 호소했다면 엄마는 냉정하게 말했을 것이다. '여기서 불만 불평하면 아빠한테 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이내 부정적인 감정이 들더라도 감추기 바빴다.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벅차고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엄마의 숨소리, 엄마의 손길만 닿는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을 잘 잠갔다고 생각한 자매는 자려고 눕는 순간 한 남자가 우리 방에 침입하고 말았다. 곧이어 나를 덮치려는 그 남자.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강한 몸부림으로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생의 비명과 고함 소라에 치안은 우리가 지내는 방에서 빠져나가고 없었다. 이미 동생이 엄마, 아빠를 찾았을 때는 치안은 없었다.
또 다른 트라우마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빠’라는 트라우마에서 ‘남자’라는 트라우마까지 생긴 나는 해가 밝은 낮에도 남자의 발걸음 소리에 기겁을 했고 골목길을 다니는 것조차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트라우마를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나는 상대가 걱정할 거 같아 입을 다물고 살았다. 사실을 털어놓기가 힘든 가정환경이었다.
도둑이 들었던 그 날 이후 나에게는 밤이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는 걸. 무서움 밤이라는 걸. 사춘기 소년에게는 그저 힘겨운 밤이 매일 찾아오고 있었다. 사실 우리 자매는 누구의 보호가 필요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여력이 없어 보였고 우리까지 신경 쓰게 한다면 불똥이 결국 나에게로 비수가 꽂히기 때문에 내 감정을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 식구 (엄마, 새아빠, 그리고 어린 남동생) 온전한 방에서 안전하게 생활을 하는 반면, 자매는 밤마다 불안에 두 손을 꼭 잡고 잤다. 아마 엄마는 그런 딸아이들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우리 자매를 데리고 왔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죄인 의식이 뿌리 깊게 내리고 있었다. 외갓집 식구들 역시 내가 울면 불면 엄마를 애타게 찾았기에 데리고 온 거라고! 이렇게나마 살아가는 것도 복이라고 말하는 친척들에게 아무 말하지 못한 내가 한없이 죄인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밤마다 무서워 잘 수 없는 지경까지 왔을 때 이사 가자고 했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벗어나고 싶다고 울면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기다려 달라는 말뿐이었다. ‘돈이 원수지!’ 말하는 어른들에게 아무리 때를 써도 안 되는 일이니깐. 조금 더 참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문이라도 안전하게 해달라고 했다. 친아빠로 인해 무서운 밤이 되었다면 이제는 또 다른 트라우마로 인해 아파하는 아이에게 상처를 어루만져주지 않았다. 자신들도 힘들 지경이니 자식들의 아픔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 터. 아침마다 학교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가 있는 건 아닌가? 화장실 다닐 때마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닌가? 불길한 생각을 끊임없이 했던 날들이 나를 괴롭혔고 불안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남자에 대한 공포심은 더욱더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다음날 저녁 문은 안전하게 바뀌었다. 그곳에서 1년을 버티고 살았을까?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 간 집은 온 가족이 비비면 살아가는 곳이 아닌 작은 방 두 개를 얻어 따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컨테이너 창고가 아닌 일반 집이었기에 한 없이 기뻤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23년 전 집은 주택이 많았다. 낡고 낡은 허름한 주택은 문고리로 문을 잠그는 형식이었기에 약간의 불안감은 없지 않았다. 여러 세대가 사는 곳이기도 했기에. 새로 지낸 집은 연탄보일러로 인해 현관문 맨 위 작은 창문이 존재했다. 거기 창문은 항상 열어두어야 했기에 우리는 창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면서 집 앞 골목길을 빠져 나오날때마다 싸한 느낌이 들 때마다 무시했다. 나를 믿지 않았기에.
그런데 또 다른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동생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언니야 엄마가 말하던데 이 동네에 언니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데."
"그게 누군데" "음 나는 모르지 언니를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야 섬뜩하니깐 그런 말 하지 마. 누가 나를 지켜봐. 아침 일찍 학교 가기 바쁜데".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도둑이 들었다. 동생은 나를 안고 자는 버릇이 있다.
그날 밤도 나를 안고 잔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숨소리가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쯤은 나의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쌕쌕거리는 남자의 숨소리.
그 순간 동생의 소리가 들렸다. 비명 소리가.
분명 함께 자던 동생은 몸부림으로 인해 나의 발밑에서 잤고 언니를 찾아 내 곁으로 오던 도중 머리 두 개가 보였다는 거였다. 그때 나는 무서워 꼼짝 할 수가 없었고 두려워 떨고 있었다. 자는 척을 하며 조용히 있던 그때, 동생의 비명소리에 내 곁에 누워있던 도둑놈은 재빨리 우리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왜? 무서운 환경에서 소리를 지를 수가 없을까? 강하게 거부할 수가 없었을까? 내 목숨이 위험한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싫었다. 왜 그렇게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소리도 못 내고 벌벌 떨고 있었을까?
유년시절 엄마, 아빠와의 싸움 소리에도 무서워했다. 심장이 쿵하며 쉼 없이 뛰기 시작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두려움이 닥쳐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내면의 상처가 깊었던 것이다.
결국 동생의 비명소리에 부모님들은 일어났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가 되고 말았다.
매번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까? 범인은 컨테이너에 침입한 자일까? 아니면 다른 인물일까?
좀도둑일까? 수많은 생각을 했지만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부모가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무서운 세상 사랑으로 자식이라면 안전에 신경 써야 하는 건 아닌가? 그렇게 엄마는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처럼 행동했던 엄마를 지켜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동네에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을 거 같아 엄마에게 말을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 내가 나쁜 놈들에게 강간을 당할지 살인을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고. 컨테이너 창고에서도 이 집에 이사 와서도 같은 사람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놈들을 신고 했으면 좋겠고 우리 방만은 열쇠고리로 안전하게 해 줘! 주인아줌마에게 말해서 말이야! 작은 창문도 잠가주고 환풍기 설치를 해달라고 주인아줌마에게 말해줘! 너무 무서워!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것도 하교하고 집에 들어올 때 골목길도 섬뜩해! 그러니 엄마가 당분간 마중 나와죠!"
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조목조목 말했다. 나를 따라다니는 검은 그림자가 있다는 걸 더 이상 미룰 수도 방관할 수도 없었다. 그 후 우리 방에는 열쇠고리와 환풍기 수리 작업을 했고 가족 모두 안전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 길지 않았던 내 삶은 좋은 경험보다 나쁜 경험으로 차곡차곡 쌓아갔다. 만약 좋은 것만 경험했다면 힘든 일들을 헤쳐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보석보다 더 값진 경험이 나의 자양분으로 성장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가족이 거주한 동네는 공장으로 인해 밤거리는 술 취한 사람들이 득실거렸기에 싫어하는 동네였다. 부모님들은 왜 그 동네를 떠나지 못했을까? 돈이 부족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이 모든 것이 해당되지 않았을까? 밤 심부름을 가장 싫어했다. 골목길에 위치한 집은 골목길을 벗어나는 것도 골목길에 들어서는 것도 무서웠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의 인성과 성격만 보면 되는 건 아닌가? 왜 가정환경까지 들먹거리며 상대의 자존심까지 무너지게 할까? 비판을 했지만 내가 살아가는 삶은 드라마와 딱 맞아지고 있었다.
멋지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나를 피해 다녔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서 맴돌았다. 결국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가 나의 삶에 적용하고 말았다. 어릴 적 친아빠의 술 취한 모습에 트라우마가 생겼기에 남편이 술을 먹고 오는 날은 모르는 척 그냥 자버리기 일쑤였다. 술 취한 사람들 트라우마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벌렁거리는 심장과 조여 오는 불안을 피해서이다. 친정엄마도 예외는 아니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어 해롱해롱 한 모습을 지켜보지 못해 인상을 쓰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트라우마가 치유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술 취한 모습을 너그럽게 바라보지 못할 거 같다. 이처럼 술이라는 트라우마는 친아빠가 만들어줬기에 성인이 된 지금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술만 취하면 봐줄만하다. 거기에 구토까지 하게 되면 나는 격양을 하며 숨어버린다. 조여 오는 가슴을 달래기 위해 숨어버린다. 이것이 나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기에 지금도 역시 피하고 숨어버린다. 정신줄을 놓고 술기운을 빌려 상처되는 말만 하는 술 취한 사람을 경멸한다. 술 마시는 사람을 경멸하기에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가끔 마시는 와인 한잔이 나의 주량이다. 마음 깊은 곳에 또 다른 상처가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공부하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상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올라오는 상처인지? 분노인지 알 수가 없기에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써본다. 그래야 무의식에서 숨겨버린 상처를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상처 치유 시간은 글쓰기다. 술 취한 가족에게는 냉정할 만큼 대한다. 한 겨울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신랑에게 이불 한 장 덮어주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불만을 표시한 나만의 소심한 복수이기도 하다. 사회생활을 하며 동료들과 사장님과 술을 마실 기회가 많이 주어져 20대 초반에는 그럭저럭 술을 마시며 놀았다. 주량도 대단했다. 소주 2병까지 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술 취한 모습을 가장 경멸했기에 술을 마신 후 정신줄을 놓치지 않은 채 정신을 챙기곤 했다. 술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내가 어느 순간 술을 끊게 되었다. 그건 급체로 인해 더 이상 소주의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급체는 고마운 선물이다. 술을 끊게 되니 모임 자리도 자연스레 멀리 하게 되었고 사람들도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외롭지도 고독하지도 않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 그런 분위를 즐기는 사람,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 제각기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에 난 기죽지 않았다. 먹기 싫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니깐 말이다. 하지만 그걸 이해 못해주는 가족들이 더 야속했다. 함께 마시기를 원했지만 나는 강하게 거부했고 분위기는 나로 인해 다운이 되곤 했다.
때론 와인 한 잔으로 분위기를 맞추었다. 억지로 분위기를 맞출 필요는 없었지만 가족이니깐 어쩌다 하는 음주 가문을 나로 인해 분위기가 엉망 되는 것은 싫었기에 가족들 분위기를 나름 와인으로 맞추었다. 술 끊은 지 20년이 넘었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술을 끊고 무수한 유혹에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한 인내심으로 잡초처럼 쓰러져도 다시 나를 위해 일어섰던 유년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