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해는 악몽이 해
남들은 한 번 아플까 말까 하는 투병을 두 번을 겪었다.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죽지 않았으니 말이다. 건강을 자부하지 않았지만 나름 건강을 챙겼다고 생각한 것은 나를 과대평가한 자만이었다. 때는 2012년 봄이었다. 새 아파트로 이사 가기 한 달 전 몸을 아끼지 않고 신경을 많이 썼어 그랬을까? 다른 사람과의 비교 삶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내 가족을 바라봤다면 삶이 조금은 편안했을 텐데 말이다.
행복은 한 달 남짓. 아프기 전에 징조가 있었다. 두 딸아이에게 두피에 생기는 머릿니라는 (예전 말 이)것이 생겼다. 잘 지내던 아이 머리에 머릿니가 웬 말인지! 머리를 감겨도 벅벅 간지는 아이를 보며 신경이 쓰였다. 어느 날 큰아이의 목덜미에 붙은 벌레를 보고 알았다.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두 아이 모두 머리카락에 머릿니가 존재했다. 독하디 독한 머릿니 제거할 수 있는 샴푸와 참빚으로 매일 머리카락을 빚으며 머릿니를 잡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붙은 알을 잡아야 했다. 큰 아이 학원과 작은 아이 유치원을 잠시 쉬기로 하고 말이다. 강박관념으로 인해 침구류는 햇살에 살균 소독하며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완벽한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 마치고 온 아이 머리카락을 붙들고 머릿니를 잡기 시작했다. 너무 신경 썼던 탓도 내 병을 더욱더 악화를 시켰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소화불량부터 시작했고 몸에서 신호하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며 아이들 머리에 온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선순위는 내 몸이 아닌 아이들 머릿니 제거였으니 말이다.
이사 가기 2년 전 이상한 꿈을 꾼 적이 있다. 어릴 때는 가위도 잘 눌리는 아이 었다. 무의식 중에 두려움이 많았기에 꿈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2년 전 꿨던 꿈은 지독하게도 무서웠고 끔찍했다. 이 꿈 이야기 중반쯤 하겠다. 머릿니가 어느 정도 해결될 때쯤 큰아이의 초등학교 참관 수업이 있었다. 한 아파트에 거주한 이웃은 큰아이와의 같은 또래 친구 엄마였다. 급히 먹었던 토스트가 문제로 인해 나의 병은 악화가 되었다. 그날따라 토스트가 먹고 싶었던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시간이 촉박해 급히 먹었다. 아이의 참관 수업을 듣고 나온 그 날 저녁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잘 체했던 몸이라 이번에도 장염이겠거니, 체했겠거니 아주 가볍게 생각했다. 병원으로 달려가면 되는 일이니깐, 그러나 이번에는 상태가 진정되지 않고 악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잦은 구토와 설사, 급기야 혈변이 심하게 보였고 복통은 산고의 고통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의원에서 동네 중급의 종합병원까지 다니면서 약을 처방받았지만 더 심해졌다. 먹지 못해 현기증, 혈변으로 인한 현기증이 생겨 신랑에게 도움을 요청해 동네에 위치한 중급 병원을 찾았다. 2003년 악몽 그대로 느낌이 좋지 않았다.
CT촬영 후 돌아온 의사 소견은 입원이었다. 아픈 몸 보다 어린아이들의 걱정이 먼저였다. 나는 모성애가 강한 엄마니깐, 20대 투병과는 차원이 다른 위치에 있던 나였다. ‘엄마’라는 명함을 받은 후 마음 편히 아프지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위치라는 걸, 그래서 내가 아픈 것은 나의 죄책감으로 가져왔다. 죄책감으로 가져오게 된 이유는 큰 아이가 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학교생활을 봐줘야 했고 작은 아이 역시 엄마 손이 제일 필요한 4살이었다. 이런 아이를 두고 입원이라니. 여기서 나에게 두려움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의 자리가 부재중이었던 아픈 상처가 있었기에 내 아이만큼은 엄마의 부재라는 단어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다니, 나의 간절함을 이용해 슬픔으로 남겨주시려고 그러는지, 내 탓과 함께 남 탓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토스트는 왜 먹었을까? 언니가 먹자고 할 때 거부했어야 했다. 나는 먹지 말아야 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일어난 나의 부주의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예감은 그대로 사실이 되었고 입원을 해라는 병원 측의 이야기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마음 놓고 부탁할 수 있었던 단 한분, 이 분이 안 계셨다면 마음 편히 아프지도 못했다. “엄마 나 병원이야 입원하라는데 엄마 가게 가야 하지” “입원하라고 잠깐만 있어봐라! 아이들 학교 보내야 하제.” “응, 아니면 시어머니에게 부탁을 할까 했는데 아이들이 시어머니 반찬을 안 좋아해서 엄마가 며칠만 봐줘. 입원을 오래 하지 않겠지” 라며 엄마에게 부탁을 했다. 아이를 둔 엄마는 아픈 것도 죄인이 되었다. 한 사람 아프면 주위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에. 그렇게 나는 입원을 했고 투병을 시작했다. 피검사와 소변 검사를 했지만 뚜렷한 소견이 나오지 않았다. 단 하나 염증 수치가 너무 높다는 소견과 함께 열이 동반하고 있었다. 배가 너무 아파 미칠 지경이지만 병원의 약으로는 진정되지 않았다. 설사와 구토 역시 가라앉지 않았다. 밥을 먹지 못하는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병원 밥은 계속 나왔고 음식을 보는 순간 구토가 일어났다. 약 먹는 것조차 역겨웠다. 병원에서 이렇다 할 소견이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 가는 것이 뭐가 힘드냐고 반문하겠지만 먹지 못해도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했던 상태는 어지럼증과 현기증으로 일어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힘들었다. 보호자 없이 혼자 견뎌야 했기에 몸이 힘들어하는 모든 일들을 가급적 피하게 되었다. 물론 먹는 것도 피하기 시작했다. 먹어도 아프고 안 먹어도 아프다면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이기로. 그래서 먹는 것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