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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May 24. 2021

딸이 이런 말을 했다 냉장고 비우라고

내면의 불안함을 요리 재료들로 해소하고 억압하려 했다

맛남의 광장을 보다 죽순 요리 편이 나왔다. 아이는 자신이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기다렸고 엄마는 이것만은 꼭 봐야 한다고 아이에게 설득을 시킨 후 몰입했다. 요리 영상만 보면 몰입하는 나는 요리에 천재인가? 아니면 요리에 관심이 많은 건가? 알 수는 없지만 유독 요리 프로그램에 몰입이 상당하다.


냉장고는 음식들로 채워져 있다. 어떨 때 이런 냉장고를 보며 아이가 말을 했다.

"이 많은 음식 언제 다 먹어?"라는 말을 하면 나는 그저 웃으며 "글쎄'라고 답을 한다. 사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져 있는 음식은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준 음식이라 버리기도 아깝고 먹자니 안 당기는 음식이 절반이 넘었다.


언젠가는 먹겠지 싶어 얼어둔 음식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맛남의 광장에 지금 제철인 죽순 요리가 나왔다. 버터에 볶고, 계란국을 하고, 볶음밥을 하는 모습에 문득  안테나가 섰고 '죽순'이 생각났다. 백종원은 삼겹살 기름에 죽순을 구우면 맛있다는 말에 게스트 모두 삼겹살과 죽순을 먹는 순간 맛있다는 말에 다음날 아침 메뉴로 정했다.


냉동실에 삼겹살은 없지만 대패 삼겹살이 있었다. 저렇게 하면 죽순 소비가 되겠구나 하며 꽁꽁 얼어 둔 죽순을 녹였다. 녹은 죽순을 깨끗하게 씻고 대패삼겹살과 구웠다. 그러나 티브이에서 나온 맛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이게 무슨 맛이야? 뭘 잘못한 거지?' 먹다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잘못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삼겹살 기름이 충분히 나온 다음 죽순을 구워야 한다는 거, 그러나 난 삼겹살과 함께 물에 젖은 죽순을 넣어 구웠더니 삼겹살 기름은 나오지 않았고 젖은 죽순 물로 코팅하고 있었다. 


'아... 망했다.'


돼지기름으로 볶은 죽순의 맛이 궁금해 시도한 삼겹살 죽순 구이가 실패로 돌아왔다.


"그래! 냉동실 음식 비워! 음식이 너무 많아! 엄마는 음식을 왜 많이 사는 거야?"


어린 딸은 재료를 많이 사는 엄마를 유심히 관찰한 것이다. 아이 말에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왜? 음식을 많이 사다 넣어놓을까?"


예전이라면 시장가기 힘들어 한번 나갈 때 며칠 먹을 재료를 사다 놓았다. 그 버릇이 지금도 습관이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골에 살 때 시장 한번 가기가 힘들었다. 시장이 다른 동네에 있었기에 시장 한번 가면 2~3일 먹을 음식을 소분해 냉동할 때가 많았다. 그래야 매일 시장가는 번거로움이나 시간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골 생활 10년 만에 신도시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습관이 사라진 줄 알았다.





아이와 홀로서기를 하며 길을 가다 오이가 싸면 사다 넣어놓고 쿠팡에 세일하면 사다 놓는 나는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알 수 있었다. 혹여, 나중에 세일하지 않으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닐까? 혹여, 사다 놓지 않으면 매 끼니 준비할 때 필요한 건 아닌가? 혹여, 이 재료가 없으면 맛이 없는 건 아닌가? 일어나지 않은 불안함에 이것저것 샀다가 다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되는 불상사가 매번 일어났다.


전 남편과 살아오면서 돈 아끼기 위해 재테크를 시작했다. 일명 냉장고 파먹기를 했다. 힘든 일을 하는 전 남편은 고기가 오르지 않은 식사를 거부할 때가 종종 있었다. 코스트코에서 사 온 고기를 소분해 냉동했다 구워주기도 했지만 절약을 위해선 대형 마트는 자제해야 했다. 그렇게 냉장고에 있는 음식으로 창작한 요리를 내놓으면 타박을 했다.


냉장고 파먹기를 한 결과 냉장고 속이 텅텅 빈 경험을 했다. 미니멀 라이프 하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몇 개월 만에 종료되었지만 귀한 경험을 했다. 


별거를 하고 친정집에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엄마의 이상한 불안증세를 목격했다.

냉장고 속을 빈틈없이 채워 넣는 모습에 놀랐고 냉기가 순환되지 않아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렸다. 아이스크림은 꽁꽁 얼어야 제 맛인데 엄마 집 냉동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아이스크림은 이내 녹아버렸다. 


"냉장고 그만 채워 넣어! 아이스크림이 얼지 않고 녹잖아?"

이 말에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어터지게 음식을 얼리고 또 얼리며 작은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 음식으로 넘쳐났다. 친정집 냉장고는 보물 찾기라도 하듯 꽁꽁 숨겨둔 물건 찾기에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냉장고가 조금만 비어도 불안해! 못살던 시절 때문이야. 없어서 못 먹고살던 그 시절에 한이 맺힌 거 같아 냉장고가 조금 비어 있음 불안해"


"먹지 않을 거면서 왜 넣어놔! 먹을 음식만 사서 넣어놓으면 좋잖아. 냉장고가 순환이 안되니 음식을 넣어두어도 소용없어. 먹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 오고 그래"


타박을 했다. 그만 사라고. 어느 순간 상해서 버려야 하는 음식이 많아지면서 잔소리는 자연스레 나왔다.


10평도 되지 않은 집에 냉장고만 세대인 엄마 집. 그리고 곧이어 음식들로 채워지는 냉동고는 불쌍했다. 큰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냉동고 둘 자리가 없어 친정엄마에게 선물을 했다. 냉동고 준다고 하니 좋아했던 엄마. 이내 비어 두면 누군가가 한마디 할까 봐 빈틈없이 채워 넣은 모습에 경악을 안 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그렇다. 엄마보다 덜 하지만 냉장고를 채워 넣고 필요할 때 꺼내 요리를 한다. 죽순 요리를 보고 이내 따라 해 냉장고 속을 비우는 모습에 딸아이는 "냉장고 안에 음식들 없애자" 말에 가슴속 깊이 새겨 들었다.


아이는 거짓말하지 않으니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아이니깐. 


불안함을 음식으로 채워 냉장고 속을 채우는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스승으로 온 내 아이가 너무 고마웠다.

다시 재테크할 수 있도록 아이가 말해줘서 고마웠고 

냉장고 속을 보며 내 안의 내면을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냉장고 안에 모셔둔 음식들로 최대한 조리해 먹는 일명 냉파 하기로 결심했다. 냉장고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해야겠다.


"엄마 냉장고 좀 비워!" 한마디에 불안한 감정을 알게 되는 요즘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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