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사랑하고 노래를 즐겨 불러본다
원고를 집필하면서 끊임없이 음악을 들었다. 무한 반복하며 끊임없이 듣다 보니 어느새 원고가 완성되었고 퇴고조차도 음악과 함께여야만 감정이 살아났다. 메말랐던 감정은 음악으로 새살이 돋고 있었다.
아픈 상처를 숨기기 위해선 음악을 잊고 살았던 과거가 슬펐다. 눈물이 뚝뚝 흘리며 글을 쓰고 또 쓰며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2~30대 즐겨 듣던 팝송이나 음악 제목이 기억나지 않았다. 무엇을 들었고 무엇을 좋아했는지, 음악조차 내 곁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 삶이 팍팍해서 슬픈 음악을 들으면 팍팍한 삶이 더 나락으로 떨어질 거 같았다. 그래서 음악을 버리고 숨기고 던져버렸다.
40대가 되고 나서 문득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기억을 떠올리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자 무작정 듣고 또 들었다.
내가 원하는 음악이 이토록 많은지 왜 나를 숨기고 속였는지 후회하며 열심히 듣고 있다.
바라던 바다를 시청하며 바다를 벗 삼아 풍경삼아 불러주는 감미로운 노래에 흠뻑 젖어버렸고 급기야 노래를 찾아 따라 부르며 또 하나의 삶의 생기를 찾았다.
동요만 불렀던 나는 엄마의 자리만 지켰을 뿐.
정작 나를 위한 노래는 사라지고 없었고 숨기고 있었다. 내 감정을 내 기분을 내 기쁨을 내 슬픔을 몽땅 등지고 살아갔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찾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좋아하던 노래를 다시 찾았고 따라 부르는 나를 발견했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면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이다. 꿈을 상상하고 설계하는 과정에서 음악만큼 노래만큼 멋진 도구는 없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도 그랬다.
가수처럼은 아니지만 노래만이라도 잘 부르면 얼마나 좋을까?
벅찬 가슴을
벅찬 기쁨을
벅찬 행복을
노래로 표현하고 온 몸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은 남일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아니다. 그냥 따라 부르고 그냥 따라 춤을 추면 가수 뺨치게 멋졌다. 슬픈 노래든 신나는 노래든 내가 나를 사랑하면 그건 멋진 음악이 되고 멋진 노래가 된다.
100일 목표였던 모녀 댄스는 오늘 부러 끝이 났다. 또 다른 100일 목표.
노래 부르기로 정하고 내일부터 해보려고 한다. 가수가 아니기에 음정 박자를 놓치겠지만 실망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저 나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나 다움을 찾는 거니까.
노래도, 춤도, 글도 꾸준히 하고 매일 하다 보면 느니까.
20대, 노래 잘 부른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그러다 결혼생활과 임신, 출산, 병마와 투병하면서 잊고 살았다. 직장 생활할 때 말을 많이 했다면 주부가 되고 나니 필요한 말만 하는 일상이 주어졌고 필요 없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15년을 그렇게 지내고 나니 발음도 새고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제는 노래를 부르면서 발음을 교정하면 된다. 내가 찾던 일부분의 그 길이 바로 노래 부르는 거였다.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와 춤을 추고 SNS에 올리다 보니 못할 거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침저녁으로 확언을 한지도 100일, 원하는 목표를 100일 동안 적은지도 현재 71일째가 접어들었고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자신하게 되었다.
가정보육을 하면서 짬을 내서 아이와 놀아주는 놀잇감은 엄마와 살결을 맞대며 놀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또 다른 추억을 남겨본다. 아이는 동요를, 엄마는 잊고 지낸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기로.
노래는
음악은
죽어가는 감정을 되살리는 마법 같은 일이다.
음악이 없었다면
노래가 없었다면
집필도
원고 완성도 없었을 것이다.
내 삶의 일부분인 노래와 음악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아이에게도 원하는 모든 것들을 버리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라고 말한다. 자신을 잃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인생의 선순환.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슬픔을 노래로 토해내다 보면 불안은 잠잘 것이고
내 안에 머물고 있는 기쁨을 음악으로 무한 듣다 보면 기쁨은 두배가 될 것이다.
삶의 유연함을 위해
인생의 탄력을 위해
잊어버렸던 감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을 찾아서 기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