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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Feb 13. 2022

저는 보호자가 없습니다.

엄마 에세이

홀로서기 후 가장 대두된 문제는 보호자였다. 혼자가 되고 난 후 검사가 있거나 검사 결과를 들으려 병원을 찾을 때는 보호자가 필요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아픈 나라서 보호자는 필수조건이었지만 나에게는 필수가 될 수 없었다.


가장 슬픈 일일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행복이라는 것이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니까.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받지 않을까 하는 무작정인 감정이 들었다. 요즘은 1인 가구가 늘어나다 보니 보호자 대행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대장내시경을 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에 한참을 생각했다. 조금 미룰까? 아니면 그냥 검사를 받을까? 생각을 하다 선생님이 미룰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땐 선생님은 내 생각을 읽은 거 같았다.


"선생님 내년은 안 되죠?"

"미루지 말고 이번에 합시다. 검사한 지 2년 반이 넘었죠. 미루면 3년이 지나는 시점입니다. 이번에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수긍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수면 검사는 보호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비수면으로 검사받는 건 용기 나지 않았다. 예약을 하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비수면으로 하면 어떻게 아플지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보호자가 필요한 수면 검사로 예약을 하고 말았다.


"수면내시경은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당일 날 보호자와 함께 내원해주시고 시간 간격을 맞추어 청결제를 복용하고 오시면 됩니다."

"수면 시 보호자가 왜 필요합니까?"

보호자가 왜 필요한지 알면서 나는 제차 확인을 했다.

"낙상이 있을 수 있어요. 검사가 끝나고 환자분이 회복실에 계실 때 보호자가 있어야 합니다. 잠에서 깨면 비몽사몽으로 침대에서 내려오다 낙상 사고가 많이 일어나거든요. 보호자와 동행해야 합니다"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이럴 땐 오롯이 나를 위한 보호자가 필요하구나라고.


점점 검사날짜는 다가왔고 대형병원은 방역수칙이 아주 철저했다. 보호자 1인 외는 방문 금지였다. 병원 측에 문의를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단 한 가지였다. "보호자 1인만 가능합니다" 앵무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나에게 보호자는 유일하게도 친정엄마뿐이었다. 그런데 어린 딸아이를 봐줄 만한 친척이 없었다. 너무 난감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하다 엄마에게 부탁을 했다.


"엄마, 그분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

"글쎄다. 지금은 일을 안 하니 부탁을 하면 될 거 같은데"

"여니를 그분에게 맡기고 가면 여니가 싫어할 거 같지"

"여니에게 물어봐. 만약 할아버지와 있겠다면 내가 따라가고 아니면...."


엄마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엄마 마음을 나는 안다. 뭐를 망설이는지, 자신의 자식이 아닌 남의 딸의 부탁을 들어주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걸. 거절 의사를 밝히더라도 일단은 그분 의사를 듣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그분은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말씀을 했고 아이는 할머니와 있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힘차게 밝혔다.


검사 당일 날 그분과 나는 서울행 기차를 탔고 보호자 역할을 엄마 지인분이 해주셨다. 참 다행이었다. 그분이 흔쾌히 허락을 해주셔서 안심하고 검사를 할 수 있었기에..


병원에 도착하니 보호자와의 관계를 물었다. 잠깐 망설이다 '아버지예요'라는 무의식적이 말이 나와버렸다.

친정엄마는 내가 나와 보호자 관계가 어떻게 되냐고 병원에서 물었을 때 '아버지'요 라고 말했다고 하니 엄마 반응은 영 석연찮았다. "그냥 삼촌이라고 하지"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나 삼촌이나 그들이 호적등본으로 가족 관계를 확인할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와 지인분은 20년째 알고 지내는 오래된 친구다. 나 역시 편안해서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진료 기록에 아버지라고 쓰는 의료진 뒤로 나는 검사실로 향했다. 검사가 끝나고 회복실에서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간호사는 방송을 했다. 


누구누구 보호자분 환자분 깨었다는 말과 함께 회복실로 오라는 말이 내 귓가에 전해졌다. 몇 분 후 그분은 나를 부축했다. 내시경만 하면 화장실이 급했다. 소변인지 대변인지 가스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그때는 무조건 화장실을 가야만 했다.


수면이 덜 깬 상태에서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해준 그분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혹여 쓰러질까 봐 자신도 모르게 안간힘을 쓰고 나를 부축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아마 처음 겪는 경험이라 그분이 당황했던 거 같다. 


내가 내시경실로 들어간 순간 그분은 담배 한 개비를 피우려고 휴게실로 향했고 잠시 한 숨 돌리는 찰나 방송이 나왔고 급히 내 곁으로 오셨다. 검사가 끝나고 제정신이 돌아온 나에게 식사를 하시면서 말을 건넸다.


"내가 휴게실에 있는데 방송하더라. 너 나왔다고. 근데 검사가 그렇게 빨리 끝나는 건가? 담배를 꺼내는 순간 방송이 나온 거야"

"그렇게 빨리 검사가 끝났다고요? 그럼 담배를 못 태우신 거예요?"

"응. 피우려고 하는데 방송이 나와서 부랴부랴 회복실을 찾은 거야"


보통 30~40분 정도 검사를 한다. 근데 그분 말을 들으면서 의아했다. 아마 내가 찾은 병원은 초행길이라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 헤매다 휴게실을 찾은 거 같았고 한 숨을 돌리며 담배 태우려다 방송이 나온 거 같았다.


하루 종일 굶은 나는 기차를 타기 전 간단하게 요깃거리를 해야 했고 나를 위해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던 그분과 함께 밥을 먹었다. 


무사히 모든 일정을 마치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수고하신 엄마와 아이 그리고 엄마의 지인분과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 보호자가 없다는 건 아픈 사람으로서는 참 치명적이었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엄마의 보호자가 될 테고 나 역시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일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는 필수가 되어야 할 보호자.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친정엄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면 나의 보호자는 누가 될 수 있을까 고심이 깊은 날이 되고 있다. 보호자 대행업체 도움을 받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앞으로 보호자가 필요한 날들이 많을 텐데 든든한 지원군이자 나의 보호자는 누가 될까?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될 수 없는 상황은 늘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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