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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Dec 30. 2021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게 머물지 못한다

유키즈 보다

요즘 단어 하나에 진득이 고민하는 습성이 생겼다. 물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고 생각이 든다. 예전에 나라는 사람은 단어 하나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나와 상황에 맞는 단어만 골라 위로를 받았다.


근데, 요즘 아니 몇 년 전부터 달라졌다. 뭐가 달라졌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상황이 맞지 않아도 상대가 하는 말에 깊이 생각한다고...


로소 (로맨스 소설)를 읽으면서 감정이 말랑말랑 해지는 걸 느낀다. 그리고 상대의 감정을 읽기 시작했다. 과거 나라면 내 감정에 집중하고 분한 것만 생각하고 억울하다며 속으로 울었다. 점점 나를 앗아가는 행위를 스스로 했다. 결국, 몸은 병이 들고 말았고. 내가 나를 힘들게 했고 병까지 얻었다는 결론을 맞이 했다.


병까지 얻고 나니 나를 스스로 알아야 했고 내가 나를 더 건강하게 잘 보살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상대의 말을 조금 다르게 해석을 하고 생각하게 된 습관이 자리 잡았다.




당연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자문했다. 세상은 '당연'하다는 건 없다.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뛰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한다. 


무의식 속에서 상상하고 그렸던 그 그림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상상 속의 모습이 조금씩 그려지고 있다. 이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살을 깎고 피를 토해내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게 생과 사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시절이라고 해도 말이다. 


병들어 병상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던 시절..

당연히 죽음을 맞이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죽을 줄 알았던 내 육신은 다시 살아났고 하늘의 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당연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가 한 평생 내 곁에서 도와주고 응원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당연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면 한 번은 저 세상으로 가야 하는 이치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도 당연히 내 곁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당연히 나도 한 평생 죽지 않고 살아가지 못한다. 몸이 병들고 난 후로 나는 '죽음'을 자연스레 떠올린다.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보다 몸과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고 있다.


그리고 곁에 계시는 모친을 떠올리며 언젠간 죽음을 맞이 해야 할 마음을 준비한다.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아프다고 하는 엄마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렵다. 무섭기도 하고...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어야 할 고통이기에 내 마음을 준비한다. 


준비는 죽음을 곧 다가왔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끼듯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취향, 좋아하는 향수 등 알아가는 과정이다.







유키즈를 보면서 종양 내과 선생님이 말을 했다. 생을 마감하는 암 환자와 가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환자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면 귀로는 듣고 있으니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을 거예요"라고..

어떤 보호자는 환자가 뭐를 좋아했는지 몰라 노래를 틀지 못했다고 하며 당연하다는 건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고... 말을 했다.


어떤 환자의 보호자는 '땡벌'이라는 음악이 고요하고 엄숙한 병동에 울러 펴졌다고 한다. 선생님이 보호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이 노래가 환자분이 좋아했나요?"


보호자는 환자가 한 평생 공장에서 일을 하며 자녀를 키웠다고 공장에서 들었던 땡벌 노래를 18번 곡이라고 가족들에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과연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을 말할 때 귀담아듣고 있었나 하는 거다.


결코, 아니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보내고 있었다. 


"나는 회를 좋아해. 나는 검은색을 좋아해. 나는 미스 트롯에 나온 임영웅 노래가 좋아" 만날 때마다 했던 엄마 말이 떠올랐다.


한이 맺혀 있던 엄마는 엄마가 부르고 듣던 노래가 내가 듣기에는 구슬펐다. 엄마가 듣고 불렀던 노래를 밀어냈다. 그러나 엄마는 구슬픈 노랫말로 자신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고 있었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병을 안고 사는 사람은 하루가 늘 조심스럽고 위태롭다. 정상인보다 몇 배로 두려움을 안고 산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스스로 다독이고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을 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이 다가오면 오늘도 잘 보냈다고 안심하며 잠을 청한다.


아픈 사람은 언제 어떻게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 위기가 닥치기 전에 스스로 다독이고 하루를 즐기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죽음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


꼭 아픈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건강하게 지내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볼 수 없는 사건을 종종 맞이 한다.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서 조금은 나와 상대를 생각하며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면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곁에 항상 있어 고마움도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는 당연한 건 없다고 그걸 인지해야 한다. 

나를 볼 때마다 습관처럼 말하는 엄마 말을 귀담아듣고 새기는 딸로 남기로 했다.


할머니도 꽃을 좋아한다고 손녀에게 말을 했다. 그때 듣고선 "엄마도 꽃을 사랑하는구나! 그동안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서 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은 엄마였구나"알게 되었다.


올해 초, 꽃 도매시장에서 꽃을 한 다발씩 사 오면 엄마에게 나누어 주었다. 엄마는 싫지 않은 표정이 기억이 난다. 그도 여자라는 걸.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억세고 거친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리고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여자였다. 엄마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버리고 자식을 위해 희생한 엄마는 당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줄 알았다. 점점 늙어가는 엄마, 예전에 했던 음식을 지금은 힘겨워하는 엄마를 보며 당연하게 그 자리를 지킬 거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당연은 없다.


죽음이든, 미래든, 현재든 모든 상황이 내 곁으로 온 이유는 분명히 있다. 부모도 나도 자식도 영원히 곁에 당연히 있지 못한다. 아니 당연히 없다. 


10년 전, 병들고 나서 유서를 매년 기록한다. 아주 짧게라도, 단 한 줄이라도 유서를 작성하려고 나면  힘들 때 유서를 들춰본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자극제이기도 하다.


'죽음' 언젠가는 닥칠 일이다. 당연히 오는 거지만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도 이 세상을 즐기는 방법일 것이다.

살아가는 힘을 줄 것이다. 나에 대한 예의일 것이고 상대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오늘도 난, 나를 더 알아가고 내 아이의 마음을 알아가며 모친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간다. 당연히 오래 있을 줄 알았던 가족, 나, 그리고 멋진 세상은 당연하게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간다.


떠나기 전, 준비를 하는 거다. 당연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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