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빈 작가 Apr 06. 2022

육아의 기다림과 방치 사이에서 성장하고 있다

엄마 에세이

아이에게 발레는 피로회복제다. 피곤하다며 가기 싫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가야 한다는 깊은 마음이 가득했다. “오늘 그냥 쉴까?”라는 말로 유혹한 엄마의 말에 아이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엄마인 나에게 속삭이는 악마의 소리였다. ‘내 몸이 무겁고 피곤한데 그냥 쉬자고 할까’라는 유혹의 말은 내가 나에게 하는 소리였음을 아이가 알려주었다.     


“정말 쉴까? 아니야 그래도 난 갈 거야. 집에 있으면 심심해”하며 아이가 먼저 외출 준비를 한다. 그런 아이를 보며 무거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본다. 피곤해서 다크서클이 눈밑 아래까지 내려온 아이는 발레 학원에 도착하는 동시에 피곤함은 날아가버리는 거 같았다. 엄마와 있는 30분 시간이 지겹고 심심한 아이는 또래의 친구가 있는 학원이나 유치원이 피로회복제였다.     


6년 동안 새벽에 자고 오전 11시에 일어난 모녀였다. 친정엄마나 나는 “이런 생활패턴을 가진 아이가 유치원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늘 있었다. 새벽 12시에 잠드는 일은 기본이었고 낮잠을 자지 않던 아이는 아침잠이 많았다. 그 결과 늦은 오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그저 나는 기다리고 지켜보는 일 말고는 없었다. 다른 집 아이를 비교했다면 불가능한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기다림과 방치는 다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기다림은 비교하지 않고 오롯이 아이를 기다리는 거라고. 방치는 아이가 무엇을 하던 무시 하며 비교하는 것이 방치라고 했다. 나는 기다림과 방치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아이의 불안한 증세를 완화하고자 심리센터를 다닌 적이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그때 부모 테스트가 있었다. 나 역시 응했는데 허용하는 범위에서 오락가락하는 유형이었다.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엄마인 내 기준에서 일관성 있게 말과 행동을 했다는 것이 거짓으로 들통난 부분이었다. 기다리다 지치면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어구 내가 뭐하는 짓이야’ 하며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아이에게는 득이 될 때가 있고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멈추게 되었다. 행동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며 기다리게 되었다. 그 결과 아이는 엄마가 깨우지 않더라도 새벽에 일어나는 아이가 되었다. 대견스러웠다. 주말 역시 아침 7시에 일어나 나를 깨운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배움에 열정을 보인다. 그리고 에너지를 쏟은 후 낮잠을 자지 않던 아이는 낮잠에 빠져든다.      


기다리다 보니 누가 깨우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어나는 아이를 보며 한글과 숫자 때기에 내려놓았다. 이 또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아이가 스스로 유치원을 다니는 것처럼 아이가 한글에 대한 열정이 가득 힐 때 배우자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직 한글이 어려운 아이는 영어를 더 잘 쓰며 알파벳을 외우고 있다. 육아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림 끝에 아이는 스스로 자신이 필요한 영역을 찾게 될 거라는 믿음이 확실히 생겼다. 믿음과 기다림 끝에는 분명 사랑과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테기 극복한 사연. 나는 글을 써야만 하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