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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Oct 17. 2022

밤 따러 가기는 나의 트라우마 부수는 약속

엄마 에세이

아주 오래전 일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 풍경, 바다 풍경, 들판 풍경을 보러 다녔던 그날이 요즘 새록새록 피어난다. 왜 그럴까? 그때가 그리운가라고 나에게 물어보면 그냥 지금 현재에 할 수 없는 일이 그때는 손쉽게 이루어진 것에 새삼 감사함으로 돌아왔고 지금 아이에게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미안해서였다.


오래전에 갔던 밤 따기 체험은 산기슭에 있었다. 거기를 가려면 차가 없어서는 안 되는 시골길.


아이가 일곱 살이 되고 자연이 주는 먹거리와 풍경을 눈으로 보고 만져보는 그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 아팠다. 내가 운전을 안 하는데도 불구하고 온 몸은 나른하고 아팠다. 여행 가자는 말이 나오면 좋다가 이내 힘들었다. 가족을 케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힘들었던 그 시간을 회상하면 그게 전부 추억이 되어 내 아이에게 해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연아 지금쯤 밤나무에 밤이 주렁주렁 열려 있을 건데. 밤송이를 찾아 밤 알맹이를 꺼내는 그 작업은 그 어떤 기쁜 일보다 기쁨이 두배가 되거든.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데 말이야. 멋진 체험을 놓치게 해서 미안해. 지금 할 수 없어 미안해. 엄마가 용기 내서 운전 공부할게"

"언제 할 건데. 나 밤 따러 가고 싶은데"라는 아이 말에 아이에게 약속했다.

"겨울까지 공부해서 내년에는 밤도 따고 갯벌에서 조개도 잡고 시골에 가서 일주일 살다 오고 제주도 가서 한 달 살기도 하자. 엄마가 꼭 약속할게. 엄만 너와 한 약속은 꼭 지키지"

"응, 엄만 나와한 약속 지켜. 그럼 이번에도 꼭 지키겠네"

"그렇지. 지키려고 너와 손가락 걸고 약속하는 거잖아. 이건 너와 한 약속이기도 하지만 엄마와 엄마가 한 약속이기도 하지. 왜냐면 어마 무시한 엄마의 트라우마를 깨는 일이거든."

"트라우마가 뭐야?"

"엄마가 예전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그 사고를 직접 겪고 나니 용기가 나지 않는 거야. 무섭고 두려워서. 근데 이제는 그 무서움과 싸워야 하고 두려움과 싸워야 할 시기가 온 거지. 너와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 말이야"

엄마의 고통을 어렴풋이 아는지 아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젠 나에게 남은 가장 큰 트라우마 운전이다. 매번 글로 다짐하고 각오를 하지만 쉽사리 트라우마 깨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가 이미 따온 밤을 보며 다시 두려움에서 싸우겠다는 각오를 한다. 


힘듦과 고통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빛바랜 사진처럼 다가온다. 15년 전의 추억을 조심스레 보다 보면 아픈 상처 뒤에는 항상 빛바랜 사진이 되어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 한 장이 가슴에 새겨진다. 그걸 알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과거, 어떻게 해야 옳은 선택을 하는 건지 항상 두 갈래에서 우왕좌왕했던 과거는 이젠 추억으로 다가왔고 잘못된 선택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제대로 된 선택할 힘을 얻게 되었다.


두려운 그것을 한발 내디뎌야 할 때. 우선 쉬운 것부터 하는 거다. 할 수 있다. 가을밤을 따기 위해서. 오래된 빛바랜 사진 속 추억을 따라가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추억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리라. 아이의 응원을 받으며 겁쟁이 엄마는 다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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