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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Nov 11. 2022

나도 모르게 묻어버린 큰 비극에 대한 감정 정리한 날

엄마 에세이

책을 읽다 비극적인 장면이 떠올랐고 순간 그 장면이 멈춰버렸다. 난 왜 이 장면을 잊고 지냈는가? 왜 난 그 장면이 떠올랐는가에 대해 오래전 일을 꺼내게 되었다. 그리고 두통이 심하게 찾아왔고 더는 책을 읽을 수 없어 덮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행동을 자매는 고스란히 마주하게 되었고 무서웠다. 비명을 지를 수 없었던 나와 반대로 동생은 비명을 지르고 울었다. 울면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게 보낸다는 어릴 때 들었던 어른들의 협박으로 울지 못하고 속으로 울었는지 모르겠다.


자매를 한 여자 힘으로 키워내야 했던 엄마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일이 많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항이 심하다. 저항을 뚫고 나를 알아가야만 한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엄마의 비명과 붉고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그 모습은 30년이 지났는데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마음에 묻어버렸다.


자신의 몸을 훼손하면 상대는 자신이 한 행동을 반성할 거라는 엄마 생각. 그러나 그건 일시적인 것을 알면서 엄마는 자신이 한 행동이 최선이라고 했다. 자신이 아프면 속을 썩이는 상대가 정신을 차릴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는데 엄마는 반복했다.


그 후로 나에게 '남자' '아빠' '남편'은 무서운 존재임을 무의식에 새겼는지 모르겠다. 상대가 화를 내는 모습에 소름이 돋치도록 무서웠던 어린 나, 가슴이 뛰다 못해 멈춰버릴 거 같은 심정지가 일어나기 직전 정신을 차린다. 


엄마가 했던 그 행동을 내가 따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설사 상대가 괴물로 변해 있다면 난 말하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면 된다고 나를 달랬던 어느 한 과거가 떠올랐다.


무서워 떨고 있는 동생들을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그 책임을 엄마는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전했다. 입술이 새파래졌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떠는 자매는 부모에게 사랑은커녕 상처만 가득 안고 성장했다. 그 당시 남동생보단 여동생을 달래기 바빴다. 남동생은 엄마가 책임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다락방에 혼자 있던 동생이 있다는 걸 알고 여동생에게 남동생을 데려 오라고 했다.


난 어른들이 헤집어 놓은 그 광경을 대면하기 힘들었다. 던져진 살림 파편을 볼 수 없었고 엄마 비명 소리를 다시 상기시킬 용기가 없었다. 혼자 떨고 있던 어리고 어린 동생들을 내 품에 안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심호흡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깊은 밤. 고요하게 숨을 쉬며 바깥 전쟁이 잠잠 해지를 바라고 또 바랐다.


30년이 넘어 잊어버려야 할 한 장면으로 내가 왜 온전한 사랑을 믿지 못하는지 알게 되었다. '남자'는 힘없는 여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스스로 정했던 것이다. 상대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 그 곁에 있지 못하고 피하고 또 피했던 40년.


엄마 곁에는 배우자가 없다. 그리고 맏이인 나 또한 배우자가 없다. 남자에게 받은 상처는 아무래도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가 얼룩져 치유하지 못한 상처 덩어리였다.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내 안의 혐오하는 것이 '아빠에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아빠가 아닌 '남자'를 대상으로 나에게 상처를 내고 또 내며 살았던 것이다. 엄마가 했던 행동은 나는 할 수 없으니 입 다물고 눈 감고 귀를 막고 살았다.


내면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채 무슨 이유로 내가 나를 아프게 하는지 알 수 없어 밤마다 가위에 눌리고 무서운 꿈으로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불안하다고 점을 치기도 했다.


점은 결국 내 몸이 망가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여자 인생이 산산조각이 났고 가슴속 깊은 곳에 고름 투성이던 상처는 더 깊은 곳에 박혀 '남자는 악마고 괴물이야'로 새겨져 있었다.


분명 아버지를 용서했고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데 내면에 머물고 있던 아이는 아니었나 보다. 붉고 붉은 액체 장면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직 난 이 부분을 더 자각하고 더 깊은 상처를 끄집어내어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내 아이를 위해서 말이다. 나를 보며 자라고 있는 아이를 위해서. 


남자는 나를 헤치지 않아. 

남자는 나를 미치게 하지 않아.

남자는 나를 괴물로 만들지 않아. 


부정적인 의식을 벗어버리고 남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 오늘은 며칠 전 덮어버린 책을 꺼내어 읽을 용기를 내기 위해 깊은 감정을 글로 풀어내지 못하지만, 겉돌고 있는 감정을 먼저 풀어본다. 


나에게 말한다. '그날 그때 본 건 너를 힘들게 하려고 했던 것, 그 무엇도 아니야. 어린 너에게 보이면 안 되는 상황을 보여서 미안해. 엄마가 어른인데 행동은 어린아이였네. 그만 훌훌 털어버리고 트라우마를 깰 수 있도록 도와줄게. 엄마의 잘못된 행동, 말로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하지 않은 용서. 내가 나에게 해본다.


엄마 손목에 그어진 선명한 자국. 그걸 보면 나는 외면한다. 지금은 상처가 아물어 보이지 않지만 난 아직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난 내 가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했고 얼굴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무한한 선을 긋고 생활했던 그때 "말을 해. 말을 해야 내가 알지. 인상 쓰면 다야. 뭐가 불만이야. 불만을 말해. 인상만 쓰고 말고"가 상대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어렴풋이 알겠다. 나를 적대시하고 위협을 가하는 모든 사람에게 방어하는 방법이 묵비권과 인상이었다는 걸. 난 그때 괴물로 살고 있었다. 인상 쓰고 있는 나를 사람들은 피했으니 말이다. 동생이 그랬다. "언니는 얼굴에 다 표나. 뭐가 기분 나쁜지 뭐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다른 사람이 알 정도로 얼굴로 표현을 했어. 그래서 무서워서 모두가 다가오지 않는 거야. 어느 정도 숨겨야지. 그렇게 언니 마음을 얼굴에 다 표현하면 누가 언니 곁에 있겠어" 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동생이 한 말의 뜻을.. 

지금은 내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조금은 알 거 같다. 상대가 나를 피하고 곁에 다가오지 않는 이유를.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려고 했던 행동이 아니었고 얼굴에 내 감정을 다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역으로 다 표현이 되고 있었다. 직장 생활조차 늘 지적되었던 것이 바로 이것들이었다. 인간관계, 사회생활, 남녀관계 난 그저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많아서 스스로 나를 지키려고 했던 행동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물 수 없게 했던 것이다. 


반면, 동생은 가면을 아주 잘 쓰고 있는 아이 었다. 자신이 좋든 싫든 가면을 완벽하게 쓰고 그들과 관계를 유지한 결과 인맥이 넓다. 자신이 힘들더라도 그 인맥을 놓지 않았던 동생은 그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임을 본인은 모른다.


난, 나에게 해가 되는 모든 사람을 차단했다. 붉은 액체를 떠올리며 내 몸에는 그들로 인해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겠노라고 상처는 입히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며 살았다. 분노는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에게 질린 사람은 내 곁을 떠났고 난 혼자 남았다. 마음 깊이 파인 상처를 도려내는 일은 나라는 사람을 모두 까발려야 하는 일이다. 작은 상처부터 아주 큰 상처를 다 까발려야만 온전한 내가 탄생되는 일.


어지럽다. 정리되지 않은 지난 상처. 손이 떨린다. 떠오르지 않은 상처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올 거 같아서. 무섭다. 그 시절로 돌아갈 거 같아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심장은 터져버릴 거 같았던 과거가 떠오를 거 같아서. 나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준 그들은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서 어깨가 무겁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묻어버린 상처를 대면하는 순간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다. 수치스러워서, 내가 미워서.


갑갑해서 숨을 쉬지 못했고

두려워서 숨을 멈췄고

무서워서 숨을 참았던 시절이 싫어서 홀로서기를 하며 나를 다시 점검한다. 다시 이 감정을 정리하겠지만, 

또 이 감정을 들여다볼 용기가 생길지 미지수다. 하지만 난 엄마니깐. 올바른 내가, 온전한 내가 되려면 깊게 파인 상처를 들여다보며 며칠씩 앓아눕더라도 과정이 필요하다. 아픈 과정이 반복될지언정 반복해야 할 치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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