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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Jan 01. 2023

심리학은 내가 가진 불안을 알려준다

엄마 에세이

'누군가를 통해서 나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지요' 문장에서 내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언제인지 따져보았다.


주말에는 아이가 있어서 온전한 내가 될 수 없다. 내가 끌어안고 있는 과거, 부정적인 감정이나 느낌을 집중할 수 없다. 아이 감정에 충실히 반응해야 하고 아이 질문에 맞장구를 치면서 보내는 시간이라 가족과 함께한 시간은 나를 잠시 방치한다. 곧 방학이라 조금 더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혼자만의 시간은 보름이 지나야 찾아오니 답답함이 있다. 아이만의 시간을 위해 다녀야 하는 방학은 사실 버겁다. 키즈카페라도 가야 그나마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보상으로 주어진다.


내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혼자 거리를 걸을 때, 혼자 쇼핑을 할 때, 혼자 밥을 먹을 때,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차 안, 이 모든 것은 아이가 유치원에 간 시간이다. 묵힌 감정을 솔직히 털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글이다. 글이 나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검은 안개만 깔려있던 과거가 한 겹씩 벗겨지면서 먹구름만 있는 것이 아닌 과거를 알았다. 나를 생각해줬던 동료의 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친구와 선한 라이벌 의식을 가졌지만 서로에 대한 생각은 컸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다 보니 상처가 났고 애정 크기만큼 배신도 컸다.


이 감정을 수십 년 안고 살다 온전한 내 시간이 허락되면서 지옥 같았던 회사생활에 대한 분노를 한 겹씩 벗기게 되었다. 서로에게 기대했던 애정이 커서 결국 배신으로 얼룩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걸 알기까지 그 친구를 참 많이 미워했고 질투하며 급기야 중오까지 했다. 이 모든 감정은 나에게 했던 것이다. 미웠던 나, 질투하는 나, 증오하는 나에게 초점이 맞춰졌던 것이다.


이 불행을 청산해야만 인간관계를 자연스레 맺을 거 같았다. 친구와 내가 다르다고 느꼈던 계기는 바로 책을 읽고 나서다. 한날 한사에 태어난 쌍둥이조차 기질과 성격이 다른데 하물며 생일이 같은 남과 내가 같을 수 없지 않은가? 난 어리석게도 내가 하는 생각을 친구가 똑같이 해주기를 바랐다. 친구 생각이 다름을 알고 나서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나는 아주 미숙한 사람이었다.


같은 날 태어났는 이유로 친구와 비교하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친구가 하는 일은 늘 잘 되었고 나는 반대였으니 좌절감이 상당했다. 친구가 잘 되는 모습에 배가 아팠던 것은 사실이다. 친구의 모든 행동을 따라 했던 나는 따라쟁이가 되었다. 따라 하면 친구가 간 정상에 나도 갈 것만 같아서 따라쟁이가 되었는데 결국 실패로 돌아왔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엄연히 다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따라가다 넘어져 코가 깨지고 마음이 깨지면 난 나에게 비난을 쏟아냈던 과거를 떠나보려고 한다.


이 모든 감정은 내가 나에게 했던 것을 그때는 몰랐다. 친구처럼 잘 되고 싶다는 절규, 친구처럼 평온한 삶이었으면 하는 절규가 분노로 변했다. 친구에게 한 분노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 했던 분노를 애써 외면했다. 외면한 이유는 이제야 안다. 아파서 너무 아파서 두 눈 뜨고 쳐다보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괴물이 되어 있을 거 같아서 외면했던 과거였다. 혼자가 되고 나서 당시 나의 감정을 들여볼 수 있었다. 불쾌함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거 같다.


과거가 먹구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큼한 귤처럼 상큼한 나날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먹구름에 가려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다. 심리학 서적은 줄곧 이런 말을 한다.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들여다보라'라고. 예전에는 이 말 뜻을 몰랐다. 알았더라도 분명히 나의 잘못이 크기 때문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깐.


심리학을 읽다 보니 그들이 하는 말 뜻은 내 나름대로 해석하게 되었다. 완전한 내가 되어야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차단할 수 있다고 재해석했다. 바보같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가 가진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남의 시선에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를 비난하기 바빴을 과거가 존재한다.


오래전부터 혼자 있고 싶었던 나는 이런 나를 알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노와 질투를 한가득 안고 살아가는 나를 알기 위함이었다. 혼자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추상적인 희망은 불안하고 불만이 가득한 감정을 들여보기 위한 바람이었다. 난 아직도 심리학을 손에 들고 내면 깊숙한 곳에 나를 괴롭히는 감정을 꺼내려고 한다.


되돌이표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 부메랑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내 인생을 위해서다. 마흔 기점으로 되돌이표가 되었던 인생을 청산한다. 비록 수치심이 가득했던 과거를 들추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이제는 해야 한다. 제삼자 눈으로 나를 봐야만 한다. 그리고 제삼자가 바라보는 눈으로 온전히 아파하는 나를 꼭 안아줘야 할 때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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