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내 딸
"엄마, 나는 엄마 구두도 내가 다 신을 거야. 버리지 마."
"엄마. 나는 엄마 옷도 내가 다 입을 거야. 다른 사람 주지 마."
"엄마. 우리 학교 올 때 이거 입고 머리 이렇게 풀고 화장은 조금 더 진하게 하고 예쁜 구두 신고 와~"
딸은 엄마의 옷장을 탐방하고 엄마의 화장대를 굽이굽이보고
엄마 구두장의 구두를 보며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상상하고 그렸다.
어느 날 외출준비가 완료된 5살 딸아이의 손에
작은 가방과 돌고래 키링과 립밤과 휴지가 들어 있었다.
돌고래 키링은 자동차키를 모방한 것이며 립밤과 휴지도 엄마의 외출모습을 따라한 것이었다.
딸은 그렇게 엄마가 입는 대로 먹는 대로 준비하고 정리하는 대로 커갔다.
하지만 딸은 엄마의 옷과 구두를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엄마보다 작은 체구로 엄마의 것이 자신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이 엄마의 옷장을 물끄러미 보며 "이게 다 내 것이 될 줄 알았어. 내가 욕심을 부렸네."
신발장의 화려하고 높은 구두들을 보며 "이 구두도 다 내가 신을 줄 알았어. 엄마 구두는 정말 예쁜데. 아까워"
어느 금요일 밤. 편한 것만 입고 신고 다니는 나에게 딸이 말했다.
"엄마, 엄마 이쁜 옷들 왜 안 입어? 난 엄마가 예쁜 옷 입고 우리랑 사진 찍었던 날 다 기억하는데."
"엄마도 몸이 변하니까... 불편하니까 안 입게 되네.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우리 딸 입을까 싶어 두었지."
"엄마. 엄마한테 맞는지 안 맞는지 내가 봐줄게. 한 번 입어봐. 다 봐줄게."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렇게 입어보며 지난날을 떠 올려 보고 싶었던 걸까. 딸이 하자는 대로 하나씩 입어 보았다.
하나씩 입고 벗을 때마다 딸은 "엄마, 엄마는 보는 눈이 정말 탁월해. 옷이 지금 입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아. 튀지 않고 그러면서 뒤지지도 않아. 엄마 지금 입어도 다 너무 잘 어울려. 엄마는 역시 가을 웜톤이야. 가을 웜톤이 너무 잘 어울려."
칭찬을 아끼지 않는 딸 덕분에 칠, 팔 년을 거의 묵혀두었던 정장들을 입어보았다. 딸의 말대로 지금 입어도 전혀 유행 타지 않은 딱 좋은 핏의 옷들이었다. 사춘기 딸에게 내 안목을 칭찬받으니 남다른 자부심도 생긴다.
게다가 딸 덕분에 처분해야 할 옷과 그래도 아직 두어야 할 옷들이 구분되었다.
엄마를 한 껏 세워준 딸은 한없는 애교스러움으로 엄마에게 찰떡같이 안긴다.
"엄마. 엄마 하나도 안 늙었어. 엄마 엄청 멋지고 예뻐. 알지?"
눈물이 났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랬나 보다. 매일 거욱 속 나를 보면서 밝음을, 애써 웃음을 유지하려 했지만
어느 날은 그 애씀을 내려놓고 싶어 질 때가 있었고 조금씩 지쳐갈 즈음이었나 보다.
마흔 후반을 지나 쉰을 바라보고 있는 요즘 괜한 우울감이 자리할 때가 있다.
충전시킨 에너지는 생각보다 빠르게 소진되고 다시 채워지기까지 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림을 느끼며 짜증이 더 오래 자리할 때가 많아졌다. 그런 나를 딸이 알아챘다.
"엄마. 나 엄마랑 같이 자도 돼? 엄마랑 같이 자고 싶은데..."
딸과 함께 누웠다. 어릴 적 자던 버릇처럼 손을 잡았다.
여전히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딸의 작은 손이지만
그 누구보다 더 뜨거운 온기를 품었고 더 크게 나를 잡아주는 딸의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는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느 때보다 마음 편히 깊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한동안 지속되던 불면증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