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안녕 K

인정하기 싫은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요란하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깨어난 K는 오늘따라 더 무거운 듯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출근 준비를 한다.

창밖을 보니 어둑한 하늘이 금방이라도 빗줄기를 뿜어낼 듯한 기세로 잔뜩 찌푸리고 있다.

화장대 거울로 창밖 하늘처럼 어둑한 K의 얼굴이 보인다. 잠시 거울을 응시하다, 이내 파운데이션을 얼굴에 펴 바르는 K의 손놀림이 분주해진다.


이제야 사람 같고만... 흐음...

K는 나이가 들수록 메이크업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메이크업에 공을 들여 사회생활이 가능한 얼굴로 만들고, 머리 손질에 옷까지 입고 나서야 문밖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문밖을 나선 K는 여름의 희미한 기억을 품은 초가을의 서늘함을 피부로 느끼며 출근을 재촉한다.


회사 근처에 다다르자,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무거운 발걸음만큼 마음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마음도 무겁다. 이 증상은 5년 동안 계속되어왔다. K는 알고 있다. 좋아서,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입에 풀칠하기 위해 애를 쓰고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이 비참하게 느껴지지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버텨야 한다는 의무감에 돌덩이를 안고 매일을 버텨왔다.


예전 같지 않은 기억력과 매 순간 다가오는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우왕좌왕하는 자신의 모습에 맞닥뜨릴 때면 K는 이런 의문이 들곤 했다.


이대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까?


언제 죽을지 알 길은 없으나, 길어진 평균 수명만큼 먹고 살 일거리가 늘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는 중년에게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두려움이다.

더군다나 비혼 주의를 이마에 붙이고 사는 독거 중년에겐 치명적인 두려움인 것이다.


K도 한때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현모양처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두 단어에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참으로 고단한 20대와 30대를 겪으며, K는 자연스레 비혼 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일찍 결혼했다면 장성한 자녀가 있을 나이지만, 정신은 철이 덜 든 상태로, 외양은 세월을 비껴가지 못한 채 그렇게 중년을 맞이했다.





피곤한 하루를 뒤로한 채 갈수록 무거워지는, 갈수록 침침해지는 눈을 껌벅거리며 도심을 가로지르던 K를 향해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들려오는 한 마디,

어머님! 이야기 좀 듣고 가세요!

순간, K는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라고?

흔히 길에서 만나곤 하는 '도를 아십니까?'의 한 명으로 보이는 남자가 K를 불러 세운 호칭이었다. 잠시 잠깐 과거로 흘러간 K는 그래도 30대엔 '학생'이라고 불러 세우던 '도를 아십니까'를 떠올렸다. 이 호칭의 영원한 상실을 알리는 알람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이야기를 듣기는커녕 벼락같은 호칭에 감전돼버린 K는 '어머니'란 세 글자로 도배된 머릿속을 부여잡고는 허공에 뜨는 듯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돌아와 멍하니 소파에 앉은 K는 생각했다.
'인정해! 인정하라고!'
'비록 결혼도 하진 않았지만, 이젠 '어머니'란 호칭에 익숙해질 나이가 됐다고!'
...
......
........
그래, 그렇지. 그럼, 아무렴.
...
......
........
근데, 근데... 말야.
인정하긴 싫다. 아직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찾아든 세월의 흔적들이 K를 급습했던 하루가 결국엔 비 한 방울 뿌리지 않은 고구마 같은 밤하늘을 삼키며 흘러가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