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이 천만 관객을 끌어모을 동안에도 제목에서 풍기는 암울함 때문인지 영화를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관객들의 호불호가 심하게 엇갈리는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잠재울 수 없어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기생충'의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먹먹해짐이 속상함으로 바뀌면서 눈물이 났다. 어떻게 이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 재미없다! 한 마디로 평할 수 있었을까란 의구심이 들었다. 처절하고 참혹해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어떻게 그런 평을 할 수 있었을까? 현시대를 살아가는 상반된 두 계층 간의 처절한 간극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확인하는 것이 내겐 일종의 고문 같았다.
[ 기택(송강호)의 네 가족이 살고 있는 반지하 단칸방 ]
[ 공짜 와이파이를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 ]
[ 글로벌 IT 기업의 CEO 박동익(이선균)의 저택 ]
기택(송강호)의 네 가족이 살고 있는 반지하 단칸방엔 바퀴벌레가 함께 동거하고 있으며, 밤마다 술 취한 취객의 노상방뇨는 덤이다. 기택의 반지하 단칸방은 도시 부유층인 박사장(이선균)의 넓고 깨끗한 저택과 대비를 이루며, 반지하의 암울함을 아는 이에겐 불편한 공감을 일으킨다.
두 계층 간의 극한 대비를 위한 설정이었는지 몰라도 기택의 네 가족은 모두 무직이다. 간간히 부업이나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기택의 가족에게 한 줄기 빛처럼 박사장 딸의 가정교사로 아들 기우(최우식)가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의외로 순진한 박사장의 아내 연교(조여정)를 꼬드겨 기택의 온 가족은 박사장의 집에 위장취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제3의 계층이 등장하는데 바로 박사장의 이전 가정부였던 문광(이정은)의 남편 근세(박명훈)가 바로 그러하다. 근세는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었던 '대왕 카스텔라'를 운영하다 망한 뒤, 사채업자에게 쫓겨 이 사회에서 존재를 감추고 박사장의 지하 비밀 공간에 숨어들어 아내 문광의 도움으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제3의 계층이다. 이 부분에서 '기생충'이란 영화 제목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기생충'의 범위... 그것이 궁금해진 것이다.
기택의 가족이 정당한 방법으로 취업한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노동을 제공하고 대가를 지불받는 계약관계임에도 그들까지 싸잡아서 '기생충'으로 매도한다면 '기생충'의 범위 안에 들지 않는 '을'이 과연 있기나 하겠느냔 말이다. 그것이 불편하고 속상했다. 이 영화 하나로 이 세상의 '을'이 '기생충'으로 매도당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제3의 계층으로 표현했지만 근세도 '대왕 카스텔라'의 사업주였다. 그 또한 현실의 풍파에 휩쓸려 본의 아니게 지하에 숨어 살게 되었지만, 이에 대한 일말의 양심으로 박사장의 사진을 붙여놓고 날마다 '리스펙'을 외치며 감사함을 표현한다. 그러한 그를 '기생충'이라 매도한다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박사장이 아내 연교와의 대화에서 기택이나 가정부 문광이 선을 넘지 않아서 맘에 든다는 말을 한다. 노동의 계약관계에 있어 그 넘지 말아야 할 '선'은 '갑', '을'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사장 부부 또한 기택의 가족들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사장은 그 '선'을 넘었다. 그 첫 번째는 기택의 가족에게서 나는 '냄새'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한 것. 두 계층 간엔 돈의 많고, 적음의 구분이 있을 뿐, 그로 인한 인간의 근본적인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새로운 발견이라 한다면, 어이없게도 냄새가 계층을 구분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본능적인 감각인 냄새를 통한 경멸은 기택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린다. 지하철에 타면 나는 냄새? 과연, 그 냄새가 어떤 냄새일까? 박사장의 냄새에 대한 이 표현은 아마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두 번째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바로 추가 근무에 대한 그들의 태도이다. 돈을 주는 '갑'이면 휴일 전날 밤에 갑작스레 전화해서 '을'의 상황도 파악하지 않고,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나와라' 명령해도 되는가? 돈을 주는 '갑'이면 '을'에게 휴일 수당 주니까 '일의 연장'이라며, 말도 안 되는 일을 강요해도 되는가? 답은 당연히 'NO!'이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이런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이미 충분히 넘고 있으며, 당연시되고 있다. 노동자를 노예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인 사람으로 본다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진 않을 텐데...
아래 영화 '기생충'의 포스터에 보이는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에서 알 수 있는 공생, 상생이란 이상의 실현은 서로 간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켰을 때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두 계층 간의 그 선은 서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영화는 비극으로 끝난다.
무더운 여름, 시원하게 비나 내렸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원하게 내린 비가 반지하에 사는 이들에게 크나큰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해마다 침수되는 반지하방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영화 '기생충'을 통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돈을 많이 벌어 박사장의 집을 매입하면 아버지는 그 지하 계단을 걸어 나오시면 된다는 기우의 편지는 가난의 쳇바퀴 속에서 가난이 대물림되고, 빈부의 격차가 날로 커져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 사회에서 헛된 몽상처럼 아득하게만 들려온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마음이 불편했다.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데도 이 영화를 재미있다! 재미없다! 한 마디로 평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