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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일상을 방해하는 생각의 함정

개리 마커스의 [클루지]

책을 읽어내는 건 쉽지만, 읽은 책을 정리해서 글로 써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작업을 해내면, 읽은 책이 기억에서 고스란히 사라지는 상실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내겐 포기할 수 없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무수한 책들 중에 어떤 책을 만나게 된다는 것, 그것은 영화 '첨밀밀'에서처럼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인연으로 만나기도 한다. 개리 마커스의 [클루지]는 유튜브의 맞춤형 추천 알고리즘으로 알게 된 어느 유튜버의 추천 도서였다. 그렇게 알게 된 또 다른 유튜버는 아마존의 후기를 분석해 이 책을 비추천 도서로 낙인찍었지만, 이 책의 '인간의 마음이 시종일관 오류에 빠지는 그 이유'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주기에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리 마커스는 인간의 신체가 세련되게 설계된 기관이라기보단 '클루지(kluge)', 즉 서툴게 짜 맞춰진 기구라고 말한다. 가령, 직립 보행으로 똑바로 서서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단 한 개의 기둥으로 전체 몸무게를 지탱해야만 하는 척추로 인해 요통에 시달려야만 한다. 현명한 설계자가 인간을 설계했다면 있을 수 없는 결함이다. 하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척추는 네발짐승의 척추에서 진화했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선택의 '적절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마커스는 '진화의 관성'이라 불렀다. 진화란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형태들을 수정하면서 진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선택이 최고의 설계를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어설픈 진화의 속성으로 인해 불안정한 클루지가 생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한 가지 나쁜 소식은 이러한 불안정함의 공식이 인간의 마음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인간의 마음엔 클루지가 넘쳐난다.


이 책에선 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영역인 '기억, 신념, 선택, 언어, 행복'에 내재한 마음의 클루지들이 어떻게 생각의 함정이 되어 현명한 일상을 방해하는지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13가지 제안을 제시한다. 솔직히 13가지 제안이 썩 와 닿진 않았지만,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심리적인 오류인 클루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라고 느꼈다. 




우리의 기억은 컴퓨터처럼 저장소에 있는 기억을 정확하게 끄집어낼 수 없다.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맥락이나 단서를 사용하는데, 이때 기억의 왜곡과 간섭으로 인해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기억은 불안정해진다고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것처럼 기억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만,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끄집어낸 허술하고 맥락 의존적인 기억을 기반으로 하는 어떠한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신의 오염이란 이처럼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사고하려고 애를 써도 인간의 신념은 기억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에 우리가 아주 어렴풋이 의식하는 사소한 것들의 영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p76


이러한 기억의 오류를 '착각'이라 부르기도 하며, 착각은 기억뿐만 아니라 상황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면접관이 면접 보기 전에 따뜻한 음료를 마셨을 때와, 차가운 음료를 마셨을 때, 같은 면접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심리 실험을 본 적이 있다. 예상했겠지만 따뜻한 음료를 마신 면접관이 차가운 음료를 마신 면접관보다 면접자에 대한 평가가 좋았다. 이렇듯 인간의 균형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사소한 클루지들이 존재하며 그것이 신념 체계에 스며들면 더 암울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정보의 무비판적 수용은 실로 위험하다. 심지어 헛소문도 많이 들으면 진실이 되는 세상이다. SNS를 누비고 다니는 가짜 뉴스들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가짜 뉴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에 편향된 추론을 뒤섞어 원하는 뉴스를 만들어낸다. 또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양산되는 뉴스들도 많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 마음의 클루지를 역이용하는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느샌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그 신념이 오염되고, 그것이 심하면 편집증이 되기도 한다. 편집증은 편집증을 낳아 자신의 편집적인 신념을 확증해주는 증거들에만 주목하게 되고, 그것에 반대되는 증거들은 무시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우리가 믿고 싶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인간은 균형 있게 사고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편향될 수밖에 없다. p94
진화의 산물이자 클루지인 우리 인간은 종종 결론에서 출발해 그것을 믿기 위한 이유를 찾는 식으로 거꾸로 나아가는 비합리적인 존재이다. p104


이 책에선 정상적인 사람들이 때때로 통제력을 잃게 되는 클루지의 원인을 아래의 4가지로 요약했다.


1. 흥분의 순간에 너무 자주 반사 체계에 우선권을 넘겨주는 어설픈 자기 통제 장치


2.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확증 편향


3. 동기에 의한 추론


4. 어떤 사람에게 화가 날 때면 그에 대한 불쾌한 과거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맥락 의존적인 기억


이런 것들이 합쳐져 차가운 이성을 압도한 '뜨거운' 체계를 만들고 그 결과는 종종 분열과 전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분열과 전쟁의 역사를 만들어낸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클루지를 생각하니 갑자기 몸서리가 쳐졌다. 앞으로 인류의 역사를 움직일 누군가도 분명 클루지에 취약한 인간들일 테니, 이건 어떤 공포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최근 일련의 혼란스러운 국제적인 이슈들을 바라볼 때에 어느새 클루지가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 공포가 현실이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결국 이 책의 정수는 이 한 문장에 있지 않을까 싶다. 불완전함을 통찰하라!이다. 혹자는 이 불완전함을 인간의 위대함이라 칭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결정에 영향을 미칠 불완전함을 자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자각해야 한다. 지금 결정한 것이 클루지가 아닌지 자신에게 적절한 시간과 휴식을 줌으로써 잠시 기다리며 파악하거나, 최대한의 주의집중을 통해 객관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내면의 클루지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클루지의 함정에서 허우적대고 싶지 않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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