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봉이야. 부모님이 주말 일정 끝나면 같이 저녁 하자하셔”
한창이었던 결혼 준비가 마무리되던 10월이었다.
예비 시부모님은 평소 외식을 즐겨하셨다. 30년 넘게 살고 계신 지역 맛집들은 거의 다 섭렵하고 계셨고 남자 친구와 방문할 때마다 이곳저곳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봉이는 은근히 맘이 놓였다.
28년 살아오며 요리를 마주할 기회가 많이 없었던 게 부끄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막연히 결혼 후 여러 가지 시도해 보면 그럭저럭 실력이 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잦은 외식은 예비 시어머니 역시 요리에 관대? 한 분이신 거 같아 알게 모를 부담을 줄여줬다.
저녁 식사 후 남자 친구의 집에서 간단한 다과를 먹기로 했다.
둘러앉은 식탁.
잠시 뒤 사과가 꺼내져 나왔다.
"자, 봉이가 한 번 깎아봐."
‘.. 헉’
"네.. 근데 제가 많이는 안 해봐서요. 모양이 안 이쁠 수 있어요."
아뿔싸 예상 못했다.
어쩌다 가끔 엄마가 해보라고 쥐어주면 한입에 베어 먹는 사과가 훨씬 맛나다며 요리조리 피할 궁리로 헤헤거렸던가. 뭉텅뭉텅 깎아먹어도 맛만 좋던 그 흔한 사과는 그날 한없이 낯설었다.
허공에 대화는 떠있어도 모두의 시선이 내 손에 집중되어 있던 그때. 느려도 너무 느렸다.
궁정 조각가가 왕이 명령한 흉상을 제작하듯 공을 들였다.
한 세 조각 정도 완성했을까?
"허허 이거 큰 일이네. 사과 깎는 거 안 배우고 왔어. 장손 며느리가 이래서 되겠어?"
가늘게 뜬 눈으로 놀리는 건지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예비 시아버지 한마디에 순간 얼음이 되었다.
'오빠.. 빨리 땡 좀 해줘. 아무 말이나 던져보란 말이야.'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남자 친구는 깎아놓은 사과 한 조각을 찍어 얼른 아버지 입에 넣어드렸다.
멋쩍은 웃음으로 끝난 티타임에 남은 게 있었다.
미지의 단어 장손 며느리.
뜻밖에 만난 인생 밖의 그 단어가 마음속에 들어와 요동치고 있었다.
나 역시 손하나 까닥안해본 그 집 귀한 아들과 마찬가지인 어느 집 딸내미였을 뿐.
장손 며느리를 꿈꾸며 사과 깎기를 달인처럼 연마한 20대 미혼 여성일 거라 생각하신 걸까?
그날의 테스트를 필두로 수많은 검증 퀘스트가 이루어졌다. 시부모님이 꿈꾸던 며느리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인지 의심하고 끝없이 확인하고 싶어 했다. 애초에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관심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느끼는 불쾌함의 강도는 세지고 무례가 짙어졌다.
게다가 퀘스트들은 남편 모르게 교묘히 진행된 적이 너무 많았다. 후에 그가 알게 됐을 때 그는 무척 괴로워했고 나에게 미안해했다.
그런데 참 바보 같았다.
‘그만해 주세요. 하고 싶지 않아요’ 란 말 대신 나는 착한 며느리병에 걸린 사람처럼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임했다.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바로 직전까지.
왜 그랬을까?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오로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나만의 사랑 표현이자 존중의 방식이었다.